<내가 살아온 이야기>
나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대전으로 이사했다. 아버님은 대전에서 제재소를 하셨다. 어렸을 때는 잘 살았다. 집에 트럭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문창초등하교 5학년 때 부도가 났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다. 대전중학교 다닐 때에는 할머니와 토끼풀을 뜯어 토끼와 닭을 키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은 나와 형을 친척이 운영하는 양은냄비제조공장에 취직시키려고 했는데, 어머님이 울면서 반대하셔서 다행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대전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학교 성적은 중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서 갑자기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는 늘 학교에 내는 돈을 제대로 내지 못해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고,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을 한번도 가지 못했다. 과외는 물론 못했고, 참고서도 국어, 영어, 수학에 한권씩밖에 보지 못했다.
첫해에 서울법대에 지망했다가 떨어졌다. 시험 보기 보름 전에 감기에 걸려 병원도 못가고 심해져서 지독한 감기몸살을 앓는 상황에 시험을 보았던 탓이었다.
대전에서 아버님이 빚을 내서 조그만한 집을 짓는다고 해서 나는 집에서 놀면서 일하는 사람들 심부름을 하면서 8월 초까지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 빈둥거렸다.
8월 중순에 서울로 올라와 대입재수학원인 정일학원에 들어갔다. 당시 정일학원은 매달 말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에 대한 시험을 보아서 문과와 이과에서 각 5등 안에 들면 다음 달 학원비를 전액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이 때문에 정일학원 다닐 때 학원비를 한번도 내지 않았다. 당시 종로학원에 구본정 선생님이 계셨는데, 대전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종로학원으로 옮기셨던 분이다.
종로학원에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 유진렬 군과 같이 구본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집안이 어려웠던 사정을 알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중학생을 가르쳐볼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기꺼이 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중앙대학교 다니는 대학생이 행당동에서 중학교 3학년 학생 세명을 영어와 수학 과외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대학생이 그만둔다고 해서 내가 대신 과외지도를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2학년생이었던 친형이 하숙하고 있는 삼선교 부근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아침에는 광화문에 있는 정일학원에 버스로 다녔다.
학원에서 삼선교로 돌아오면 하숙집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버스를 타고 행당동까지 가서 과외를 2시간 하고 돌아왔다. 을지로 5가에서 65번 버스를 갈아타고 다녔다.
가는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이 걸리고 과외 2시간 하고 하숙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이렇게 일주일에 일요일 빼고 토요일까지 6일간 매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가 터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삐쩍 마른 몸에 이를 악물고 재수생활을 했다.
재수한 끝에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술집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대 동기생 3명과 함께 국가원수비기모욕죄로 구류 20일을 살았다.
나는 대학교 다닐 때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입주과외도 두 번이나 했다. 1977년 운이 좋아서 전국에서 80명 뽑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국가원수비기모욕죄로 구류 20일 산 전과가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3차를 통과해서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군법무관으로 입대한 후, 법무관 훈련을 받고 있던 1979년 10월 박대통령이 서거했다. 군사독재정권이 끝나서 그랬는지 나는 육군 대위로 법무관생활을 마치고 나서 검사로 임명되었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초임 발령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받았다.
검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국제형사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범죄인인도법을 만들었다. 국제형사사법공조조약을 체결하러 다녔다. 형법개정작업 실무를 맡았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주립대학 로스쿨을 유학하고 돌아와서 법무부에서 미군범죄를 담당했다. 대검찰청 환경과장을 2년간 했다.
이때 미국 환경범죄단속시스템을 파악하러 2주간 혼자 미국에 출장을 가서 미국 공무원 및 환경단속직원, 환경단체임원 등 100여명을 만났다. 한국의 환경범죄전담검사제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조선일보에서 환경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경희대학원에 들어가 7년 동안 공부하면서 석사와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천지청장, 대전지검 특별수사부장, 서울서부지청 특별수사부장을 거쳐 서울중앙지검 공판부장을 역임했다.
이때 나는 서울서부지청,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기독교 신우회장을 했다. 1998년 검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처음에는 단독으로 하다가 2000년 법무법인 태일을 설립하고 대표변호사가 되었다. 주로 형사사건을 맡고 있었다.
나는 검사 시절에 형법, 형사소송법, 국제형법, 환경법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썼다. 시집도 두 권이나 냈다.
변호사 개업하고 신림동 고시학원에 가서 고시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형법 강의도 했는데, 역시 전문강사와는 차이가 있어서 그만 두었다.
사법연수원에서 형사변호사실무와 국제형법 담당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검찰-경찰 수사권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검찰동우회 편집위원을 오래 맡기도 했다.
사단법인 맑은환경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총재를 맡았다. KBS 2 TV 생활법정 재판장을 담당하기도 했다. KBS TV와 JTBC TV 고문변호사를 오래 했다. 한명숙 장관님을 모시고,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으로 몇 년간 활동했다. 이 때문에 2005년 6월 23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강동에 있는 고덕중학교 학교폭력자치위원회 위원을 몇 년간 담당했다. 그후 대한공증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수년간 담당했다. 2011년부터는 법학전문대학원 평가위원회 특별위원장 및 사무총장을 맡았고, 2018년부터는 평가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정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형법과 헌법을 강의했다. 학교폭력방지센터를 설립했고, 외국인인권보호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 사법정의실천연합을 설립하고 상임대표가 되었다.
법무부에서 시행라는 마을변호사제도에서 나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마을변호사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익변호사로 지정을 받아, 서울 강동구 성내동과 고덕2동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변호사 명예교사제도에서 서울 강동구에 있는 상일미디어고등학교 명예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청심사위원으로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검사로서 폼을 잡지 않고, 뇌물 먹지 않고, 룸살롱 가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변호사로서 돈만 챙기지 않았다. 악덕 변호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골프 대신 배드민턴, 테니스를 쳤다. 대전에서 검사로 근무할 때에는 당시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님을 모시고 해동검도장에 다녀서 검은 때를 따기도 했다. 법대를 다닐 때에는 나는 태권도반과 역도반에 들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백화점 보다는 동대문시장, 재래시장을 이용했다. 그래도 나는 돈을 많이 번 변호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막걸리를 먹어도 마음 편한 게 좋다. 내가 잘 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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