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람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다


정현은 김현식으로부터 충분한 자료를 확보했다. 우선 급하게 해야 할 일은 범죄에 대한 증거자료를 찾는 것이었다. 정현은 수사팀을 편성했다. 베테랑 수사관 5명을 모아 팀을 짰다. 그래서 임무를 부여했다. 천강주식회사 사무실에 가서 어떻게 비자금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예행연습을 했다.

 

김현식은 자신이 현장에 직적 갈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 약도를 그려가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현장을 급습해서 압수수색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상대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첫째는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수사기밀이 새면 수사는 수포로 돌아간다. 특별수사에 있어서 핵심이고 요체다. 알파요 오메가다.

 

또한 압수수색을 하러 갔는데 현장에서 직원들의 저항을 받게 되면 그 시간에 다른 직원들은 증거자료를 빼돌리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래서 신속하게 저항을 제압하고 압수수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철저한 준비만이 대책이었다. 그리고 훈련된 직원이 필요했다. 압수수색을 많이 해 본 수사관들은 현장에 도착하면 신속하게 필요한 증거자료를 확보한다.

 

정현은 수사관들과 협의해서, 토요일 오후 시간, 대부분의 회사 직원들이 퇴근한 시간을 잡아 현장에 가도록 했다. 그래서 디데이를 잡았다. 검찰청 봉고차를 동원했다. 금고문을 열 전문가도 대동하도록 했다. 김현식의 진술을 근거로 해서 내사사건으로 만들어,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압수수색영장이 없이 압수수색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현은 수사팀을 현장에 내보낸 후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검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압수수색은 수사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큰 기업체의 경우에는 압수수색이 실시되면 그 즉시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기업체와 거래하는 금융기관이나 다른 업체에서는 수사를 받는 기업체와 거래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위기에 몰리게 되고 장기화되면 부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수사팀은 5시간에 걸친 압수수색과정에서 천강주식회사의 회계장부와 비자금장부 등을 10박스나 압수수색했다. 정현은 수사팀들과 밤을 새면서 압수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수사를 해서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강주식회사 사장은 회사에서 20억원이나 되는 비자금을 조성해서 임의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관계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수사 초기에는 매우 완강한 자세로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사 앞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하면, 곧바로 구속되고 회사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관계공무원들에 대한 뇌물공여사실을 시인하면 그 공무원들도 구속되고 파면된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검찰에서 수사가 시작되면, 대부분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비자금조성까지는 쉽게 밝혀진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작성하는 공식적인 장부 이외에 비밀리에 별도로 작성하여 관리하는 장부가 압수되면 회사자금의 업무상횡령사실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자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그것이 수표로 사용되지 않는 한,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뇌물 같은 부정한 돈은 대개 현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한 거래에 대해서는 영수증 같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뇌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거래에 대해 특별한 물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처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돈을 준 사람의 자백을 받고, 그에 대한 정황증거를 찾아내면 처벌이 가능하게 된다.


천강주식회사의 정순용 사장은 끝까지 버텼다. 자신은 모두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회사의 자금 관리는 전무이사가 했고, 자금담당임원들이 한 일이다. 자신은 비자금조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정현은 시간을 가지고 회사자금의 흐름을 파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충분히 밝혀낼 자신이 있었다. 김현식 부장이 제공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관계공무원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하고, 증거확보에 나섰다.

 

정순용 사장은 하루 아침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밤낮 없이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만 해왔는데 왜 갑자기 검찰에서 자신의 회사를 타겟으로 해서 특별수사를 벌이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검찰에서 어떻게 자신의 회사의 내부사정을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사가 진행되자 대충 감이 잡혔다. 김현식부장이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 내부사정을 투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은 김현식부장에게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 사장은 배신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직원을 시켜 김부장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김부장은 회사 직원을 만나주지 않았다.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을 찍힌 것이었다. 정사장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당뇨에 고혈압이 있었고, 의사의 말로는 콜레스트롤도 놀고 지방간도 있다고 햇다. 술담배를 더 이상 해서는 안된다는 권고를 받았다. 얼굴도 예전과 달리 검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몸이 나른해서 30분씩 안락의자에 누워 쉬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정사장은 세상에 사람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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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 손님이 많아서 하루 종일 바빴어. 잘 있었어?”

“네”

“샵은 괜찮아?”

“불경기라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하긴 요새 다 그렇다고 그래. 웬만한 곳은 모두 현상유지도 어렵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해야지요. 뭘”


윤석은 서영의 밝은 모습이 맘에 들었다. 처음 볼 때부터 서영은 항상 미소를 띄고 세상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강남에 헤어샵을 오픈할 때부터 주위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잘 하고 었다. 워낙 열심히 노력을 하고, 타고난 감각이 있어서 서영의 샵에는 꾸준히 손님이 있었다.


서영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다. 한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재미있어 했다. 하루 하루 재미 있게 보내다 보니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3년 전이었다. 서영이 윤석의 병원에 처음 왔을 때 윤석은 서영의 미소에 반하고 말았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서영을 보고 윤석은 의사와 고객의 관계를 순간적으로 잃어버렸다. 그냥 지나쳐서는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다른 관계로 발전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서영의 수술을 최대한 성의를 가지고 열심히 해주자고 마음 먹은 것으로 그쳤다. 서영에 대한 쌍커풀 변형과 코수술 등은 윤석이 최대한 실력발휘를 해서 아주 좋은 결과가 나왔다.


자신의 이상형을 만드는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처럼 온 정성을 다 바쳤다. 간호사들도 그 수술 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졌다고 난리였다. 서영도 결과에 아주 만족했고, 윤석에게 몹시 고마워했다. 물론 돈을 받고 해 준 의사와 고객 관계였지만, 윤석의 마음에는 그때부터 작은 동경이 싹텄다.


한 달쯤 지난 후 서영은 다시 병원에 들렀다. 수술 경과를 확인해 보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내심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영의 수술경과 또한 아주 좋았다. 그래서 간단히 상태를 보고, 서영은 돌아가려고 했다. 서영이 지나가는 말로, 윤석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언제 차라도 대접하겠다고 하자, 윤석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이 차를 살테니 언제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밖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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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윤석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다. 자신이 직접 모든 수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금요일 오후에는 더욱 바쁜 시간이었다. 예전과 달리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 남자 손님도 성형수술에 관심이 많았다. 얼짱이 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대학 다닐 때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 도움이 됐는지 윤석의 수술솜씨가 좋다는 평을 받아 강남에서 손님을 끌게 되었다.

 

강남에는 성형외과 전문병원이 밀집해 있다. 특히 압구정동, 신사동, 논현동 등지에는 길거리에 성형외과 간판이 쉽게 눈에 띈다. 다른 병원들은 손님이 줄어 문을 닫기도 하고, 병원건물 임대료가 비싸 부담스러워 변두리로 옮기는 사례도 많다고 하는데, 성형외과만은 그렇지 않았다. 비싼 비용을 내고, 그것고 의료보험대상도 아닌 수술을 받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기 때문이다.

 

성형외과는 번화한 곳에 위치해 내부시설도 아주 고급스럽게 하기 때문에 개설 및 유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강남에서 윤석이 성형외과 의사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동안 피나는 노력과 손님을 다루는 노하우를 익혀서 가능했던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잠시 쉬면서 휴대전화를 보니 서영의 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7시, 인터콘티넨탈, 로비라운지’

윤석은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차를 탔다. 하루의 피로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거리에는 퇴근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거리에서 무언가 팔고 있는 사람들이 금요일 저녁시간임을 알리고 있었다.


라디오를 켜니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고소득자, 예식장 모텔 등을 경영하는 고소득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정밀세무조사를 벌여 엄청난 세금을 추징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세청은 탈세혐의가 짙은 고소득 자영업자들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해서, 소득을 축소 신고하는 수법으로 탈세를 한 사람들로부터 1,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했다는 것이었다.

 

고소득 전문직 자영엉자들의 탈루 소득이 부동산 투기 등 재산증식의 자금으로 사용되면서 부의 양극화 현상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는 논평도 들렸다. 이들은 신용카드결제를 받지 않고 현금결제를 유도함으로써 현금으로 받는 수입금액은 매출금액신고를 할 때 누락시 매출분을 누락하거나 부동산 매매소득을 신고하지 않는 방법으로 탈세를 했다고 한다.

 

매출과정에서 신용카드결제를 받지 않고 가급적 현금결제를 유도해 왔다. 라디오에서는 특히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범이 돼애 할 의사, 변호사, 세무사 등이 탈세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은 탈세가 전방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사실 사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탈세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이 있다.

 

아직도 일부 사회에서는 탈세의 유혹과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래된 관행의 탓이리라.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세금을 법대로 다 내면 남는 것이 없고, 사업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또 왜 나만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 손해 아니냐?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도 은근히 겁이 났다. 혹시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 어쩌나? 너나 할 것 없이 제대로 세금신고를 하지 않을 것인 데, 특별히 세무조사를 받아 거액을 추징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은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있고, 사회적으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세금 문제만 나오면 어딘지 모르게 양심이 찔리고 께름직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은 어느 새 서영에게로 가 있었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윤석은 마치 자신이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럽 스타일의 제복을 입은 도어맨이 경례를 하면서 윤석을 맞았다. 웅장한 호텔 건물은 웬지 묵직해 보였고,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윤석은 즐겨 이 호텔을 이용했다. 특히 1층 로비라운지는 천장이 높아서 마치 자신이 유럽 어느 도시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서영은 미리 와 있었다. 오늘 따라 밝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늘상 들고 다니는 검은 색의 샤넬백이 유난히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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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정현은 김현식이 제보한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를 하기로 했다. 김현식을 다시 만나 상세한 진술을 받았다. 천강주식회사에서는 공식적인 회계장부 이외에 실제 매출과 비용 등을 제대로 기재한 비밀장부를 따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다. 회사 비자금을 별도 통장으로 거래하고 있었고, 상당 부분은 현금으로 만들어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김현식은 회사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누가 경리를 담당하고 있는지, 어떻게 비자금을 조성하는지, 그 비자금을 사장이 어떻게 보관하고 사용하는지, 관계 있는 공무원들은 누구인지 등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김현식은 왜 그런 정보를 검사에게 알려주는 것일까? 분명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사장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김현식은 회사에 들어가 최선을 다했다. 회사와 사장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남 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회사의 매출을 위해 자존심도 버리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했다. 그런데 사장은 이런 김현식의 공로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알지 못하고 있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두도록 했다.

 

김현식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장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면 그만이었다. 다른 직장을 구하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회사 사장을 잘 살게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건 인간적인 정의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것은 그가 법과대학에 들어가 첫 강의 시간에 머리가 하얀 노교수로부터 들은 법언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법률서적을 읽으면서 그 법언을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정의는 인간사회에서 유지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정 사장이 사회에서 제재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관련 공무원들과 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약아서 세무서건 행정관청이건 경찰이건 모든 부서에 손을 써 놓았다. 관청의 실무자들은 정 사장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음 놓고 나쁜 짓을 하고 큰소리 치고 살아가고 있었다.

 

김현식은 검찰에 찾아가 사장의 비리를 제보하기로 마음 먹었다.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함께 근무했던 회사 직원들로부터 받을 비난이 두려웠다. 남의 약점을 폭로한 사람이라는, 의리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런 전근대적인 인식, 의리중시풍조가 남아 있다.

 

사실 그건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법을 위반하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수사기관에 고발하는 건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 김현식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익명으로 제보하기로 했던 것이다. 검사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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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인의 비밀을 알려 주는 사람들

 

점심 식사를 마친 정현은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요일 오후였다. 아무리 바쁜 사무실이라도 금요일 오후가 되면 달랐다. 업무를 대체로 정리해 놓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휴식의 앞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주는 여유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급한 걸음으로 비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산 하나의 차이가 그런 것이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그렇게 다르다. 조급함과 여유로움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우산 하나로 빗속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황급한 걸음 속에서 비를 불편하게만 생각하고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우산이 없어 비에 가까이 다가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런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야 하는 것이다. 우산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초보적인 단계의 기술이다. 자연과 싸우는 무기다. 우산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일차적으로 막아준다. 물론 완벽하게 빗물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아쉬운대로 머리카락을 젖지 않게 하고, 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다. 그러면서 빗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필요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하나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게 될 수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누군가가 없는 경우 삶은 망가지고 무질서하게 된다.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느긋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렀다.

"여보세요. 박 정현검사님이시지요?"

"예, 접니다. 누구시죠? "

"검사님께 중요한 제보를 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화로는 안 될 사항인가요?“

“예, 전화로는 제대로 설명드리기 곤란한 사건입니다. 꼭 좀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 사무실로 오세요."

검사에게 직접 찾아와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면 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사건화 시키는 것을 꺼리고 검사에게 직접 찾아와 중요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소장이나 고발장을 내게 되면 일반적인 사건처리절차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제보자의 신분이 노출된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타인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 수사기관을 찾아가 범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는 언론기관에 제보를 함으로써 기사화한 다음, 언론보도내용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김현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어느 기업체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에 앙심을 품고 회사 비리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천강주식회사는 연매출액이 500억 원이 넘는 적지 않은 회사였다. 김현식의 주장에 의하면,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였고, 그 비자금으로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뇌물을 써서 허가가 나지 않을 장소에 호텔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김현식은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현은 여러 가지 사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김현식은 자신이 회사의 경리부장이었던 관계로 구체적인 방법과 금액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로 수사에 협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수사는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내부자의 협조에 의해 수사의 단서가 포착된다. 내부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회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리를 수사기관에 제보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놓고 고발장이나 진정서를 내기는 곤란하므로 직접적인 제보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이나 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면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검사를 찾아가 제보를 하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심을 품고 있거나 원한이 서려 있는 사람들은 그 상대방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때 어설프게 해서는 상대방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특별수사부 검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아니면 상급관청에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청와대나 법무부, 대검찰청, 경찰청 등에는 익명의 진정서가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이벌관계에 있는 다른 공무원이 특정 공무원을 물먹게 하기 위해 업자와의 유착관계를 익명으로 투서하기도 한다. 그러면 특정 공무원은 검찰의 내사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구속도 되고 파면도 된다. 꼭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사나 수사 받는 것 자체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공직사회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에 의해 뽑다 보니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전과 달리 자치단체장 역시 낙선된 상대방이 있고, 그 상대방의 조직원들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그러다 보니 부정과 부패사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상대방측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당선된 자치단체장에 대해 고발하거나 익명으로 제보를 하는 것이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제보자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중요한 수사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소중하게 대한다. 제보자를 데리고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특정 분야의 부패실상이 어떤지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정현은 김현식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관계를 정리해 보고, 법적인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주된 내용은 사장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 뇌물문제였다. 정현은 김현식 부장에게 연락처를 남겨 놓고 일단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수사방법을 생각했다. 김현식의 진술만으로 수사단서는 충분했다. 그러나 회사 장부와 비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압수하는 것이 필요했다. 뇌물죄 부분은 사장이나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야 할 사항이었다.

 

원래 기업체의 비자금 수사는 빠른 시간에 관계 자료를 압수하는 것이 요체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체에서 비밀장부나 컴퓨터 입력자료 등을 모두 빼돌리고, 증거를 은닉하거나 인멸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 자금을 다른 용도에 사용한 부분을 찾아 업무상 횡령죄로 입건해 놓고, 그 다음 그러한 비자금의 사용처를 밝힘으로써 공무원에게 흘러간 뇌물을 찾아내는 것이 수사의 프로세스다.

 

김현식이 돌아간 다음 정현은 최 계장을 불러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최 계장은 아주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이었다. 수사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밤을 새우는 일에도 익숙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일을 많이 해서 호흡이 맞았다. 검사와 수사관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에 있다. 서로 호흡을 맞추어서 일을 해야만 수사성과가 나온다. 그리고 법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사명감이 투철해야 수사를 할 수 있다. 범죄에 대한 증오감이 넘치지 않으면 절대로 범죄인을 수사할 수 없고 처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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