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타인의 비밀을 알려 주는 사람들
점심 식사를 마친 정현은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요일 오후였다. 아무리 바쁜 사무실이라도 금요일 오후가 되면 달랐다. 업무를 대체로 정리해 놓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휴식의 앞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주는 여유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급한 걸음으로 비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산 하나의 차이가 그런 것이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그렇게 다르다. 조급함과 여유로움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우산 하나로 빗속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황급한 걸음 속에서 비를 불편하게만 생각하고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우산이 없어 비에 가까이 다가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런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야 하는 것이다. 우산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초보적인 단계의 기술이다. 자연과 싸우는 무기다. 우산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일차적으로 막아준다. 물론 완벽하게 빗물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아쉬운대로 머리카락을 젖지 않게 하고, 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다. 그러면서 빗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필요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하나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게 될 수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누군가가 없는 경우 삶은 망가지고 무질서하게 된다.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느긋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렀다.
"여보세요. 박 정현검사님이시지요?"
"예, 접니다. 누구시죠? "
"검사님께 중요한 제보를 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화로는 안 될 사항인가요?“
“예, 전화로는 제대로 설명드리기 곤란한 사건입니다. 꼭 좀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 사무실로 오세요."
검사에게 직접 찾아와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면 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사건화 시키는 것을 꺼리고 검사에게 직접 찾아와 중요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소장이나 고발장을 내게 되면 일반적인 사건처리절차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제보자의 신분이 노출된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타인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 수사기관을 찾아가 범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는 언론기관에 제보를 함으로써 기사화한 다음, 언론보도내용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김현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어느 기업체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에 앙심을 품고 회사 비리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천강주식회사는 연매출액이 500억 원이 넘는 적지 않은 회사였다. 김현식의 주장에 의하면,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였고, 그 비자금으로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뇌물을 써서 허가가 나지 않을 장소에 호텔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김현식은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현은 여러 가지 사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김현식은 자신이 회사의 경리부장이었던 관계로 구체적인 방법과 금액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로 수사에 협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수사는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내부자의 협조에 의해 수사의 단서가 포착된다. 내부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회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리를 수사기관에 제보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놓고 고발장이나 진정서를 내기는 곤란하므로 직접적인 제보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이나 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면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검사를 찾아가 제보를 하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심을 품고 있거나 원한이 서려 있는 사람들은 그 상대방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때 어설프게 해서는 상대방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특별수사부 검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아니면 상급관청에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청와대나 법무부, 대검찰청, 경찰청 등에는 익명의 진정서가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이벌관계에 있는 다른 공무원이 특정 공무원을 물먹게 하기 위해 업자와의 유착관계를 익명으로 투서하기도 한다. 그러면 특정 공무원은 검찰의 내사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구속도 되고 파면도 된다. 꼭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사나 수사 받는 것 자체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공직사회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에 의해 뽑다 보니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전과 달리 자치단체장 역시 낙선된 상대방이 있고, 그 상대방의 조직원들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그러다 보니 부정과 부패사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상대방측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당선된 자치단체장에 대해 고발하거나 익명으로 제보를 하는 것이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제보자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중요한 수사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소중하게 대한다. 제보자를 데리고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특정 분야의 부패실상이 어떤지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정현은 김현식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관계를 정리해 보고, 법적인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주된 내용은 사장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 뇌물문제였다. 정현은 김현식 부장에게 연락처를 남겨 놓고 일단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수사방법을 생각했다. 김현식의 진술만으로 수사단서는 충분했다. 그러나 회사 장부와 비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압수하는 것이 필요했다. 뇌물죄 부분은 사장이나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야 할 사항이었다.
원래 기업체의 비자금 수사는 빠른 시간에 관계 자료를 압수하는 것이 요체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체에서 비밀장부나 컴퓨터 입력자료 등을 모두 빼돌리고, 증거를 은닉하거나 인멸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 자금을 다른 용도에 사용한 부분을 찾아 업무상 횡령죄로 입건해 놓고, 그 다음 그러한 비자금의 사용처를 밝힘으로써 공무원에게 흘러간 뇌물을 찾아내는 것이 수사의 프로세스다.
김현식이 돌아간 다음 정현은 최 계장을 불러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최 계장은 아주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이었다. 수사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밤을 새우는 일에도 익숙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일을 많이 해서 호흡이 맞았다. 검사와 수사관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에 있다. 서로 호흡을 맞추어서 일을 해야만 수사성과가 나온다. 그리고 법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사명감이 투철해야 수사를 할 수 있다. 범죄에 대한 증오감이 넘치지 않으면 절대로 범죄인을 수사할 수 없고 처벌할 수 없다.
'별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의 노래 [8] (0) | 2006.03.25 |
---|---|
별의 노래 [7] (0) | 2006.03.22 |
별의 노래 [6] (0) | 2006.03.20 |
#5. 쫓는 자와 쫓기는 자 (0) | 2006.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