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와 각박한 세태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여러 가지가 합리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세상은 매우 삭막하고 각박해지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하숙생’이나,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인간적인 면은 사라져버렸다.
예전에는 교통사고를 낸 괜찮은 가해자가 불구가 된 피해자를 책임진다고 결혼까지 하는 미담도 드라마에 나올 정도였다.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중상에 빠뜨리고도 10대사고가 아니면 종합보험에 들어있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찾아보지도 않는다. 벌금도 내지 않는다.
피해자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고 병원에서 고생을 하고 평생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데, 법은 이런 대인사고를 처벌하지 않도록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해자가 가해자를 증오하고 원망해도 법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가해자는 자신이 남에게 가해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망각한다.
1968년 개봉된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주인공 문희는 신영균의 혼외자를 낳아 키우면서 애증의 늪에 빠진다. 하지만 요새는 첩노릇을 거부하고, 본처와 이혼시켜 재혼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초혼과 재혼은 오직 시간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 법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경범죄 정도로 처벌되던 성추행도 이제는 아주 엄격한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여자의 바지 위로 엉덩이를 만졌다는 누명을 쓰고 장기간 재판을 받고 끝내 무죄를 받았다. 당시 도로에 있는 CCTV 영상도 직접적인 신체접촉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검찰이나 경찰은 피해자의 일방적인 진술만에 의존해서 구약식하고 나중에는 항소까지 했다.
같이 술을 마시고 모텔에 들어가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하는 사건에서도 법은 아주 엄격하다. 가해자는 실형까지 받기도 하고, 피해자는 거액의 위자료를 받기 전까지는 절대고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가 과연 얼마나 큰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법치주의에 입각한 사고와 인식의 결과다.
접촉사고가 난 경우에도 운전자가 음주를 한 낌새가 있으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운다. 인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 법을 잘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