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풍경
가을사랑
먼 여행을 한 나그네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는다. 그가 지났던 풍경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아련한 추억이 자리잡고, 정신적으로 조금 성숙해진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집에서 살은 시간과 낯선 곳에서 살은 시간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익숙한 곳에서 보낸 삶은, 단순한 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낯선 곳에서 보낸 삶은 새로운 경험과 개척을 뜻한다. 그곳에서 찾는 삶의 경이로움은 우리에게 중요한 양식이 된다.
12시가 다 되어 택시를 타고, 구기동 북한산 입구로 향했다. 이제는 산행이 내게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이 많이 있지만, 그러다보니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다. 집에 있으면 답답함을 느낄 정도다.
골프는 오랫동안 손을 놓아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상태다. 골프장의 분위기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그곳에 적응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때문에 주변에서도 나에게 골프를 하자는 권유도 거의 없어졌다. 골프란 항상 사전에 약속을 해야 하고, 일단 약속을 해놓으면 그것에 구속을 받는다.
몸이 피곤하던 콘디션이 좋지 않아도 꼭 나가야 한다. 심지어 날씨가 나빠 비가 와도 해야 한다. 하루 종일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별로 운동도 되지 않으면서 기분이 개운치 않을 때가 있다. 물론 골프를 치면 재미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려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골프장의 귀족적인 분위기와 세상을 좁은 우물안에 넣고 보게 되는 점이 나에게 별로 맞지 않아 나는 대신 산행이나 테니스 등으로 취미생활을 전환하기로 했다. 더 나이들면 그때는 골프를 다시 할지도 모른다.
택시를 운전하는 분은, 예순살이 다 되어 보였다. 운전한 지 이제 겨우 한달이 된다고 했다. 차고지가 강동구라서 강동 송파쪽은 잘 아는데 강북으로 건너오면 지리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가는 길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그건 약간 불편한 일이었다. 반은 내가 운전에 참여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백병원 부근에 가서 갑자기 차가 서버렸다. 밧데리가 나간 것인지? 무엇이 고장난 것인지 차는 시동이 꺼지고, 비상라이트도 작동이 안되었다.
복잡한 차도 중간에서 서버리니, 뒷차들은 영문도 모르고 빵빵거린다. 내가 도와주려고 애를 썼지만, 나 역시 차에 대해 아마추어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중간에서 내려 다른 차를 갈아탔다. 택시기사는 더운 날씨에 전화로 도움을 청하고, 그곳에서 고생을 해야했다.
북한산 등산을 했다. 늘상 하는 코스인 대남문까지 올라가서 북한산성매표소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올라갈 때는 힘이 드니까, 땅을 쳐다보고 그냥 올라가기만 했다. 위를 자꾸 쳐다보면 더 힘이 든다. 생각보다는 땀이 덜 났다.
머릿 속에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찼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체계적이지 못하다. 그냥 잡념에 불과하다.
대남문에서 내려올 때는 많은 여유가 있었다. 숲 속에는 그늘이 져서 산행을 하기에 아주 좋았다. 흙을 밟으니 그 촉감이 너무 좋았다. 고급호텔의 로비라운지에 길게 깔아놓은 카페트를 밟는 것보다는 이런 숲속의 흙길을 밟는 촉감이 더 좋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올라오는 사람들과 내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가 힘들여 올라갈 때는 내려오는 사람들이 너무 편해 보인다. 내가 내려갈 때는 올라오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올라가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서로 비교할 이유도 없다. 올라갈 때는 올라가는 이유가 있고, 그 의미가 충분하다. 올라갈 때는 올라가는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갈 때는 또 내려가는 사람답게 행동하고 사고해야 한다.
다 내려와서 대로변의 포장마차 있는 곳에서 생맥주와 동동주, 김치, 두부 등을 시켜놓고 먹었다. 아주머니는 그곳에서 장사한지 3년이 된다고 한다. 1톤트럭을 개조해서 식당차를 만들어 놓았다. 아저씨는 어디 놀러갔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식당영업을 하면, 부인 혼자 일을 하도록 해놓고 남편이 놀러가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눈치를 봐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부부가 함께 공동의 일을 한다는 건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로가 다른 영역에서 각자 일을 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몇 시간동안 긴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이란 결국 서울에서 어느 산 속을 갔다온 것에 불과했지만, 내 정신은 황량한 사막과 히말라야 계곡, 그리고 화려한 외국 도시의 야경까지 다 돌아보고 온듯했다. 그건 내 정신의 자유였다.
내가 느끼고, 내가 보면서 내 영혼을 쉬게 하고, 내 정신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사고케 하는 건 모두 나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여행으로 인해 나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아니면 얼마나 더 편협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지방선거가 끝나고, 거리의 현수막은 당선사례로 바뀌었다. 당선자들은 얼마나 사회를 위해 일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을까? 국민들이 뽑아준 그들의 자리가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