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43)
경희는 식당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따라 술이 취했다. 취기가 돌자 술을 더 시켰다. 어떤 의미에서는 술에 취하고 싶었다. 술에 취해서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사람들은 조금씩 자리를 떠났다. 몇 테이블 밖에 손님이 없었다. 어쨌든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굳이 서둘러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피곤해서 모텔에 가서 잠을 잘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고도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텔이라니! 아까 낮에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게 만든 그 악몽은 바로 모텔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 모텔은 생각만 해도 정이 떨어졌다.
술을 마시고 멍하니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잠깐 같이 앉아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경희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인상이 착해보였다.
여자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배신을 해서 슬프다는 말을 꺼냈다. 경희는 무슨 말인지 듣고 싶었다. 여자는 28살이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같은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1년 넘게 연인으로 지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오늘 너무 속이 상해요.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속이 상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괜찮아요?”
“제 남자 친구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헤어지자고 해요.”
“왜요?”
“남자 친구의 새로 생긴 애인이 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고 했대요. 그래서 남자 친구가 저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예요?”
경희는 조용히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 여자의 말을 들어도 별로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문제가 뭐 그렇게 심각한 것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수시로 발생하는지 아는가? 그 정도 일은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리석게 괴로워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고, 파트너가 바뀌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싶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회적 구속을 받는 것도 아닌데, 미혼의 남녀가 헤어지는 문제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잠시 술기운에 잊고 있었던 경희의 처지가 다시 그 여자의 말 때문에 클로즈업되었다. ‘아! 남녀간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나도 처음부터 남편하고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결혼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일단 결혼했으면, 참고 살 것을...’
사랑이 괴로운 것은 본질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무조건 행복만 보장되는 사랑은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처음에 얻는 과정도 고통스럽고, 일단 얻어진 다음에도 수시로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이 반복된다. 더군다나 그 사랑이 시간이 가면서 흔들거리고, 제3자가 개입되면 폭풍에 휩쓸리게 된다.
“남자가 끝내 헤어지자고 하면 방법이 없지 않아요?” 경희는 여자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마디 했다. 별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그냥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근데 너무 억울해요. 그 남자 때문에 아이도 한번 지웠어요. 그래서 몸도 안 좋아졌고, 같은 직장에 있는 다른 여자에게 남자를 빼앗긴 것도 분하고. 그냥 포기하자니 아깝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직장에서 연애를 하고 있는데, 같은 직장의 다른 여자에게 애인을 빼앗기면 분하고 억울할 것이다. 그 말에는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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