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은 운명 (2)

박식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지금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황하다가 이면 도로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아담했다. 간판도 조그맣게 되어 있었다.

‘동백꽃 피는 마을’이었다. 특이한 것은 간판 아래 부분에 아주 작은 글씨로, 冬柏이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camellia 라고 영어로 써놓았다. 왼쪽 위에는 동백꽃 한 송이를 그려놓았다.

박식은 한자도 ‘동’자는 알겠는데 백자는 그렇게 쓰는가 의아해했다. 영어로 쓰여있는 camellia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처음에는 어뜻 보아서 카메라로 알았다. 그런데 술집에 왜 카메라로 써놓았을까 생각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camera가 아니었다.

그래서 박식은 아이들이 즐겨먹는 캐러멜을 영어로 caramel이라고 쓰려고 하다가 잘못 쓴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쓸데없이 간판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박식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에 손님들이 많았다.

작은 룸이 하나 있지만, 그곳에는 이미 손님들이 있었다. 박식은 구석 코너에 혼자 앉았다. 양주를 한 병 시키니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박식의 테이블에 앉았다.

술에 취한 눈으로 보니 박식에게는 매우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첫사랑의 여자와 많은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박식은 원래 술집에 가서 여자 종업원을 옆에 앉히고 노닥거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식에게서는 이미 소주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코를 찡끄려야 하는데, 그 여자는 직업상 돈을 벌기 위해 서비스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남자의 더러운 냄새를 맡기 좋은 프랑스 향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잔을 따르면서 여자는, “사장님은 정말 멋이 있어요. 007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로저 무어(Roger Moore) 같아요. 사장님 같은 미남을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예요.” 박식은 물론 007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젊고 매력이 있는 여자가 박식을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저 무어와 같다고 추겨세우니, 물론 빈말이겠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만일 그 여자가 박식을 ‘장동건’과 비슷하다고 했으면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박식은 이상하게 한국 남자 배우들이나 연예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 여자는 몹시 센스가 있는 여자였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박식은 간판에 쓰여있는 영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것이 동백꽃을 영어로 써놓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손님들 중에서 그 영어 단어의 뜻을 동백꽃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딱 한 명 보았는데, 어떤 85세된 노인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20살이 될 때까지 영어사전을 다 외웠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 바로 영어사전을 보고 영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밥 먹을 때 빼고, 화장실에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심지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미리 써서 준비한 영어단어를 외웠다.

그러다가 노트를 보면서 밑을 보지 않고 열탕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목욕탕 종업원이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밖에 나가 잠그지 않고 있어 거의 100도 가까운 탕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오른쪽 다리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 사람이 열탕에서 화상을 입을 때 마침 외우고있던 단어가 'burn'으로서, 한국말로 화상, 한자어로 火傷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 사람은 burn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번, 번, 번’이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스무번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영어 단어에 집중하다 보니 열탕의 물이 아주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수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목욕탕 주인에게서 충분한 손해배상은 받았지만, 다리에 화상을 입은 흉터는 평생 가지고 살았다. 그 노인은 화상을 치료한 다음 어떤 조건이 좋은 여자와 약혼을 했는데, 잠자리를 하고 나서 남자의 다리 흉터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갔다가 끝내 파혼을 당했다고 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가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내 다리의 흉터는 내가 고의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우다가 실수로 목욕탕에서 열탕에 빠진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우리 사랑을 깨뜨리면 되느냐?’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만나기 전에 뱀에게 다리를 물리는 꿈을 세 번 꾸었어요. 그런데 당신 다리 흉터가 꿈에서 생생하게 본 뱀의 징그러운 비늘과 똑 같아요. 꿈 속에서 뱀은 나를 저주하며,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유명한 역학자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뱀처럼 생긴 사람, 또는 몸에 화상 입어 뱀같은 흉터가 있는 남자를 만나면 서른 살 전에 비명횡사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면 안 돼요. 미안해요.’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인연이 없음을 확실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그 후 좋은 직장을 얻어 좋은 조건의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뱀띠였고, 얼굴도 뱀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는 85세 된 노인이 그 술집에 왔다가 간판을 보고, camellia라는 영어 단어가 동백꽃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맞혔다.

다만, 그 노인도 젊었을 때는 영어 사전을 모두 씹어먹었다고 하는 전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나이 들어 노쇠해서 그런지 영어로 쓸 때는 ‘l'자 하나늘 빠뜨리고, camelia라고 써놓았다.

그래서 술집 주인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간판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대조하면서 ’l'자가 한 자 빠진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갑자기 화를 내면, 그건 간판업자가 무식해서 ‘l'자 한 자를 더 넣은 것이지, 자신의 영어실력을 믿지 못하느냐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술집 주인과 종업원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빌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그 자리에서 화를 풀기 위해 소주와 맥주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벌주(罰酒)로 폭탄주를 열잔씩 마셔야 한다고 명령했다. 너무 겁을 먹은 ’동백꽃 피는 마을‘ 여자 주인과 여종업원은 하는 수 없이 그 노인과 똑 같이 폭탄주 열잔씩을 마셨다.

너무 빠른 속도로 폭탄주를 돌리는 바람에 앞에 놓여있는 안주를 먹을 틈도 없었다. 폭탄주가 다 돌아가자, 여종업원은 술이 약해 뻗었고, 여자 주인은 매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서 마무리지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술값도 계산하지 않고 빤히 여주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여주인은 놀라서 다른 종업원과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 노인이 죽었는줄 알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다음 날 저녁에 그 노인은 다시 생생한 얼굴로 ’동백꽃 피는 마을‘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간밤에 고생한 여주인과 여종업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성의를 표시한다고 하면서 두 사람에게 각각 현금 50만원씩 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동백꽃이 ’camellia‘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노인뿐이었다는 것이 그 술집의 전설이었다. 그 노인은 한 동안 술집에 단골로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오지 않고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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