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대상과 집착>
상대방이 실제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사랑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의해 감지될 뿐이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계속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사랑을 할 때에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어떤 괴상한 논리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서 인지한다. 동시에 이 전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여분의 것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
그는 사랑의 대상이 이런저런 장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모든 것 때문에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상상하며, 이 모든 것을 텅 빈 단어의 형태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란 축소되지 않고는 목록에 끼일 수 없는 것이기에.
“근사해!”라는 말 안에는 감정의 모든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특징도 머무르지 못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근사해란 말은 모든 것을 얘기하며, 모든 것에 결핍된 그것까지도 말한다.
그것은 내 욕망이 특별히 집착하는 그 사람의 그곳을 가리키고 싶어하지만, 그곳은 가리켜질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에 대해 결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언어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항상 망설이고 더듬을 것이며, 하나의 텅 빈 말밖에는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은 요컨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아주 특이한 욕망이 형성되는 모든 장소의 영도와도 같은 것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39~40쪽에서 -
롤랑 바르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A가 B를 사랑할 때 A는 B의 외관상 좋은 점, 멋있는 점만 추출해서 인식한다. 이때 인식된 이미지는 ‘근사하다’라는 한 단어로 끝을 낸다.
하지만 나머지 그 사람의 여백에는 무엇이 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A는 B의 좋은 점만 뽑아내어 긍정하고, 그런 멋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인 A를 또 멋있기 때문에 멋있는 B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착오에 빠진다. 그것은 사랑의 오류이다.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