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남자 교수의 슬픈 이야기

 

맹 교수는 독신이었다. “남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결혼하면 그 자체가 구속이고, 가정에 매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비록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독신으로 지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꿈이다.”

 

맹 교수는 신부처럼 순결한 이상주의자로 비쳤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맹 교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위행위 조차도 해보지 않은 고결한 성인이라고 소문이 났다.

 

지역에서 맹 교수가 이처럼 완벽한 총각이라는 소문이 나자 성당에서도 유명해져서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이 뭐 대단하다고 맹 교수가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청원을 지지하는 사람은 모두 18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요새 세상에 숫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런 남자는 재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가 능력이 없어서 40살이 되도록 여자관계를 못했으면 창피하게 생각하고 조용히 살아야지, 왜 총각이라고 떠들고 다니냐는 것이었다.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편집부장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 여성 기자가 심층적으로 취재해서, ‘남자의 순결, 그 현대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200매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를 준비했지만, 편집부장은 신문사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그 원고를 폐기하도록 했다. 그후 그 여성 기자는 끝내 고집을 부려서, ‘여성의 순결의 현대적 의미’를 기사화했다가 그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무튼 맹 교수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불거진 ‘남자의 순결, 동정’ 문제는 한 동안 적지 않는 파장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지역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남자의 동정은 돼지의 동정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맹 교수는 강의시간에도 여학생들과 시선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여학생에게 일부러 거리를 두고, 냉냉하게 대했다. 여학생이 교수실로 상담을 하러 와도,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가급적 짧은 시간 상담하고 돌려보냈다.

 

한번은 어떤 공부를 아주 싫어하는 여학생이 맹 교수에게 상담을 하러왔다. 맹 교수 강의를 듣는 여학생이었는데, 수업시간에는 긴 머리를 아예 책상에 대고 깊은 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 맹 교수가 강단에서 서서 보면, 무슨 검정색 쇼파 방석을 책상 위에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여학생은 어떤 유부남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상담을 하러 온 것이었다. 맹 교수는 한번도 성관계를 해본 적이 없어 자신은 그런 상담은 할 능력이 없다고 간단히 답변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은, “교수님이 성관계를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하지만 제 문제는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이고,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라고 오히려 맹 교수를 인생 상담하고 돌아갔다.

 

맹 교수는 이 여학생이 교수의 성관계를 거론한 것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맹 교수는 그 여학생이 혹시 자신을 짝사랑해서 다른 핑계를 대고 맹 교수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맺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순결을 빼앗기고 동정을 상실해서 큰 일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여학생이 너무 섹시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서 매혹적인 눈빛으로 맹 교수를 흥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여학생은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가슴도 거의 다 보이는 식으로 앞으로 머리를 숙이고 맹 교수와 마주 앉아 섹시한 음성으로 대화를 했다.

 

그 여학생이 돌아간 다음, 맹 교수는 성경을 펼쳐놓고 악마의 손길에서 벗아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소금을 한 봉지 사다가 연구실 문 주변에 뿌렸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 방법이었다.

 

맹 교수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매우 지극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85세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45살에 어렵게 맹 교수를 늦둥이로 나아서 애지중지 키웠다. 맹 교수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5년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였다. 아버지는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겨놓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숨겨놓은 자식들이 나타나서 상속권을 주장할까 봐 몇 년 동안은 아주 노심초사했다.

 

다행이 아버지는 바람은 많이 피웠어도,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점에서는 아버지를 높이 평가했고 존경했다. 여자들을 건드려 사생아를 만들어서 호적을 더럽히고, 자식들 간에 불화를 일으키고, 부인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지옥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맹 교수 어머니는 나이 50에 과부가 되었다. 사실 과부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나이 들면 대부분 남편이 먼저 죽는데, 좀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었다고 50살 된 여자보고 ‘과부’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혼해서 그렇건, 사별해서 그렇건,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는 그냥 여자일 뿐이다.

 

맹 교수 어머니는 남편이 죽고 나서, 커피숍을 했다. 뒤늦게 커피 배리스터 자격을 따고, 커피 연구를 했다. 남편이 남겨 놓은 돈으로 가게를 하나 오픈했다. 그 가게는 지금 맹 교수가 재직중인 대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비록 나이는 50살이었지만, 비교적 동안이었고, 아담한 몸매에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 든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대학 앞인데도 시간이 가면서 나이 먹은 대학 교수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주된 단골이 되었다.

 

맹 교수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려워서 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혼자 꾸준히 책을 보고 연구를 해서 문학이나 예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어보면, 미국 유학을 5년간 엉터리로 다녀온 사람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고 교양이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영어나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가서 외국 사람들은 잘 안 만나고, 주로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교포들과 한국말로 식사나 하고, 쇼핑이나 해서 외국에서 살면서도 영어보다는 한국말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잘하는 경우가 있다. 요새는 외국에서도 한국 방송을 볼 수 있어, 주로 한국에서 만든 드라마나 한국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주로 본다.

 

뉴스도 외국 현지 뉴스는 못 알아들으니까 안 보고, 한국의 뉴스만 봐서 한국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자세하고 심층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치 경제 군사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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