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함정(7)
가을사랑
병진은 남숙을 만나러 미국에 가볼까 하다가 회사 일이 너무 어려워져서 포기했다. 일단은 나름대로 회사를 수습해야 했다. 남숙을 만나 따지는 일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5억원의 자금이 펑크가 났기 때문에 병진은 우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급전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경기가 나쁜 탓에 돈을 빌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대로 돌아가던 회사에서 갑자기 돈을 빌리러 다니니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자와 사랑을 나누면서 돌아다니던 자신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술과 담배만 늘어갔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다.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건 운명이 아니다. 예정된 프로세스에 불과하다. 자신이 선택하는 운명의 길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하고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운명의 길은 가시밭길이요, 불행의 텃밭이다.
사실 그것은 본인 자신이 스스로를 방기했기 때문에 초래되는 결과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본인이 관리하고 아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먼저 챙기지 않고, 마치 누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고 사는 것 같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먼저 위하고, 자신을 2차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물론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는 건, 정말 무의미한 일이다.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 남 보다 먼저 자신을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 남숙과 몸을 섞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서로가 모든 것을 잊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껴안고 침묵하고 있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던 때에는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았다.
그때는 일시적이었을 수는 있어도 남숙 역시 진심으로 병진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던 그녀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정이 점차 급해졌으므로 병진은 월 3부의 고리이자를 부담하면서까지 돈을 빌리게 되었다. 월 3부 이자라면 정말 대단한 고리다. 그런데도 사회에서는 그런 고리대금업이 횡행하고 있다.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떼어먹히는 리스크를 감안해서다. 아무런 담보도 없이 위험하게 빌려주기 때문에 월 3부를 받아도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빌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무슨 사업을 해서 5억원을 빌리고 월 1500만원을 이자로 낸다는 말인가?
그런 금전대차는 애당초 부도를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전거래를 하다가 원수가 된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떼어먹히고 난리를 치게 된다. 사실 이자를 받는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3부씩 받아도 원금을 회수하려면 최소한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자를 제대로 받아도 2년 안에 부도가 나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악덕고리대금업자로 비난을 받으면서 손해는 손해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이자를 받기 위해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을 보면, 장기적으로 돈도 손해보고 인식만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모두 부질없는 욕심이 낳은 사망의 결과다.
그러던 중 거래처에서 부도가 났다. 병진은 휘청했다. 겨우 겨우 틀어막고 버티다가 마침내 병진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중간 중간 남숙에게 통화를 했으나 남숙은 돈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한국에서 어려우면 빨리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병진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진심을 알 수 없었다. 병진은 어리석게도 남숙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부도가 났지만, 혹시 남숙이 가지고 있는 일부 자금이 있으면 그것으로 무슨 회생책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의 객관성을 찾기 어렵다. 제3자가 볼 때에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사자는 주관에 빠져 전혀 불가능한 기대로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병진이 부도를 내자, 채권자들이 매일 회사로 찾아와 난리였다. 그들은 병진이 부도 직전에 빌려다 썼던 5억원에 대해 사기죄로 형사고소를 했다. 병진은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사업이 어려워진 시점에 5억원을 빌린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었다. 그 당시 빌릴 때 병진에게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회사자금을 빼서 어디에 사용했느냐는 추궁이 들어왔다.
겨우 불구속처리가 되었지만, 재판에 회부되었다. 채권자들은 병진을 상대로 출국금지조치를 신청했고, 검찰에서는 병진을 수사목적으로 출국금지조치를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후에도 출국금지는 풀어지지 않았다. 병진은 미국으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빨리 5억원의 돈을 변상하고, 채권자들에게 갚지 않으면 실형이 떨어질 위험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회사는 날라 가고, 가정은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병진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에게도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남숙을 만나 자세한 말을 들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길거리에는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을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은행잎들은 누런 빛으로 가을을 끝까지 지키는 파수병처럼 보였다. 한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한 여자에게 휘둘려 모든 것을 잃고 만 병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 지 몰랐다. 쓸쓸히 걸어가는 병진의 머리 위로 은행잎이 날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