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함정(9)
가을사랑
병진은 수사과정에서 겨우 불구속처리가 되었지만, 재판에 회부되었다. 채권자들은 병진을 상대로 출국금지조치를 신청했고, 검찰에서는 병진을 수사목적으로 출국금지조치를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후에도 출국금지는 풀어지지 않았다. 병진은 미국으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빨리 5억원의 돈을 변상하고, 채권자들에게 갚지 않으면 실형이 떨어질 위험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회사는 날라 가고, 가정은 엉망이 되었다. 병진의 부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병진이 열심히 사업을 했는데, 연쇄부도를 맞아 그렇게 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교회에 더 열심히 나가 회개했다. 그러면서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더욱 열심히 정진했다. 사업에 대한 남편의 성실성과 열성을 믿었다.
병진은 부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어리석음이 더욱 마음 아팠다. 부인에 대해 배신을 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조금씩 깨우쳐졌다. 그래도 병진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사업에 몰두해 있는 일부 사람들은 사업은 인생 최대의 목표이며 삶의 전부다. 사업에서 모든 가치를 찾으며, 그 이외의 분야는 단지 사업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조금 관심을 두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업만 잘 되면 이성문제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사업에서 성공해서 재벌이 된 회장들의 여자스캔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자신도 사업에만 성공하면 애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사업의 성공에 파묻힌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사업에 성공하면서 애인관리도 탈이 나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사업에서 성공해서 돈을 벌고 사회적 능력을 갖춘 경우에는 자기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에게 그 부와 능력을 조금 나누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좋은 일도 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성공한 남자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정당한 논리라고 착오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부인의 마음이 편협되고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거꾸로 비난까지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애정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놓으면 결국 그 복잡한 사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 건 다름 아닌 당사자 본인이다. 돈이나 사회적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남자와 여자의 문제이다.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른 비지니스 거래와 달리 애정문제는 목숨을 걸 수 있는 극단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고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 효율성이 인정되지 않는 전선이다.
병진도 지금까지는 사업에만 몰두하면서 애정문제에 대해 매우 자유분방하고 편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업이 잘 된다는 전제에서나 고려가 가능한 문제들이었다. 사업만 뜻대로 되었으면 남숙에게 빌려주었던 돈 5억원을 돌려받지 않아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걸 가지고 그렇게 억울하게 생각할 소인배도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사업에 실패하고 패배자가 되고, 다시 회생할 자신조차 없어진 지금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자신의 애정문제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했다. 아니 의도적으로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 변화였다. 언젠가는 남숙을 만나 자세한 말을 들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을 가졌다.
길거리에는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을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은행잎들은 누런 빛으로 가을을 끝까지 지키는 파수병처럼 보였다. 한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한 여자에게 휘둘려 모든 것을 잃고 만 병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 지 몰랐다. 쓸쓸히 걸어가는 병진의 머리 위로 은행잎이 날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