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개혁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견해 검토


Ⅰ. 서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 신앙생활에서도 큰 유익을 줄 뿐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데 유익을 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령은 신자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고 지속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여러 해석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개혁파 교회 내에는 신학적인 면과 목회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분명한 이질감이 생겨났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목회적으로 볼 때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가옥명의 성령론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중생과는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서 있는 목회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Ⅱ. 개혁주의의 신학적 견해


1. 개혁주의 내용


성령의 주입이라는 개념은 중생론의 핵심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 나간다. 중생은 새창조의 역사로서 성령의 주입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과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적인 원리,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 또는 은혜로운 능력들이, 중생으로 인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 또는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가 우리들 가운데 주입될 때 우리들의 심령을 전면적으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는 모든 영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리는 옛 사람을 싫어하고 부패한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의 원리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 6:6).” 구약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더욱 명백한 성령의 사역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생활이 변화도니다고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변혁이 일어나고 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을 동반하지 않는다. 중생의 교리는 중요하다.


2.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보면, ① 체험을 너무 무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 오순절로부터도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② 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 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③ 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 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④ 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 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Ⅲ.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견해


1. 오순절주의의 내용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사람이 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역력한 경험이라고 본다. 성령세례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사업, 즉 전도와 봉사에 그 핵심적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세례는 주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 세례의 결과로 집약할 수 있는 말은 ‘ 권능 ’이다. 사도행전 1:8에 의해서 “ 누구든지 성령 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다. ...... 그 사람은 반드시 그의 생활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 권능에 있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고린도 전서 12장에 있는 은사의 모양처럼 다른 것이라고 한다. 성령 세례란 받고 안 받은 것을 알 수 있는 분명한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거듭남과는 다른 그 윗 자리에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언제나 주님을 중시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주요한 목적이 증거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에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권능(=은사)을 부여 받음으로 그것을 반드시 활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령 세례는 모든 믿는 자들의 유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다 성령 세례의 자기 유업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유업을 구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성령 세례를 유업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최초로 강조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1901년 Topeka와 1906년 시무어(W. J. Seymour)가 이끈 Azusa 거리의 부흥에서는 물론, 현재까지 방언을 성령세례와 직결시키는 전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신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국내에는 하나님의성회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전통 오순절주의의 대표적 교단이다. 이 노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저자로서는 조용기 목사님을 들 수 있다. 구약에서의 성령임재의 특징을 보면, ① 구약에서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 즉 거의가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인 한정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② 구약에서 성령임재는 일반적으로 봉사를 위한 능력이었다. 대부분 성령의 임재는 지혜와 특별한 기술과 큰 육체적 힘을 주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오순절 날에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의 성령체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말로 기록되었다. 오순절주의자는 성령세례는 회심의 결과로 일어나며 사람이 거듭났다 하더라도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을 수가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오순절주의자의 대표자인 토레이는 성령세례는 그의 중생의 사역과 구별되는 성령의 사역이며, 중생의 사역의 일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오순절 순복음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이 임하는 것 즉 성령세례를 중시한다. 오순절교회에서는 성령세례 받은 증거가 필수적으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1900년대 초에 미국 성결교단에서 오순절교단이 갈라져 나올 때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을 내세우고 그것이 오순절교단의 기본적 사상이 되었다. "제1의 물결"(The First Wave)은 한마디로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로 표현된다. 오순절주의자(Pentecostals)란 외형적으로 오순절 교단에 속한 크리스천을 말하며, 보통 제1의 물결은 1900년대 초반기의 아주사 부흥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순절주의에 속한 교단들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거듭난 이후에 반드시 성령 침례(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 이상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1906년 이후에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침례의 초기 증거로서 방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어 왔고, 사실 이것이 다른 교단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들은 다른 은사주의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을 "전통적인 오순절주의자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4중"(Four-fold)복음 혹은 "순"(Full) 복음을 전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성령 침례를 주시는 분, 병 고치는 분, 앞으로 오시는 왕으로서 사역을 하심을 의미한다. "제2의 물결"(The Second Wave)은 한마디로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으로 표현되며,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예전에는 신오순절주의자(Neo-Pentecostals)라 불렸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은사주의자(Charismatics)로 불리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룬 은사운동에 참여한 자들이며, 이들의 특징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표적과 이적을 구하되 방언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며, 오순절주의 교단에 속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일반 교단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제3의 물결"(The Third Wave)은 한마디로 오순절/은사운동에 속한 교단이 아닌 미국내 다른 주요 교단 교회에서의 부흥(Mainstream Church Renewal)을 말한다. 이 물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제3의 물결 주의자"(The Third Wavers)라 불리며, 이들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와 상관이 없는 복음주의자들로서 성령 충만을 받아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를 경험하며 표적과 이적을 강조하되, 여전히 자신들의 교단에 남아 있고 자신들을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플러 신학교에서 "교회 성장" 과목과 "표적과 이적" 과목을 강의한 윔버(John Wimber)와 와그너(Peter Wagner) 같은 이들이 대표적으로 이 부류에 속한다. 특히 와그너는 「성령의 제3의 물결 : 현재 표적과 이적을 만나는 길」, 「크리스천의 삶에서의 제3의 물결」같은 책을 펴내 제3의 물결을 확산시켰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부흥운동의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을 구분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단지 위에서 언급된 차이점 정도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차이점이라는 것은 말을 바꾼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오순절/은사운동 백과사전」은 "제2의 물결"에 속한 사람들, 즉 은사주의자들도 "제1의 물결"에 속한 오순절주의자들과 똑같은 것을 경험했으며, 같은 방언으로 말하고, 같은 영(the spirit)으로 충만케 되어 능력을 받았으며 그 영에 의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역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2. 오순절주의에 대한 비판


오순절주의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면, ① 오랜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소위 성령세례적 은사와 방언에 의해서 유지된 적은 없다. 그것은 방언과 은사가 아닌 보혜사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② 삼위일체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③ 체험을 너무 강조하고 있어 깊이가 없다. ④ 체험을 강조하지만 자기네 것만 내세운다. ⑤ 성령충만을 감격 일색으로 대치하려 한다는 등이다.


Ⅳ.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성령세례란 외부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말하고, 성령충만이란 내주하는 성령이 한 개인의 영적인 영역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관하여는 양자를 동일하게 보는 견해와 서로 다르게 보는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1.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하게 보는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개종과 회개를 뒤이어 오는 경험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신자는 성령을 전적으로 받아서 주를 위한 사역에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 그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된 체험으로 보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시한다. 고전12:13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추가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2:13절 후반의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를 신자 안에서 후속적 사건으로서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경험에 있어 단회적인 경험이요, 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이며 성령충만은 예수 믿은 후의 성도들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구별되는 제이차적인 세례로 보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신자들을 “완성된 신자”와 “미완성 신자”로 나누어 신자들 간에 화합과 일치를 깨뜨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염려와 위험성이 크다. 오순절주의자들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개종과 회개를 뒤이어 오는 경험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신자는 성령을 전적으로 받아서 주를 위한 사역에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 그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된 체험으로 보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시한다. 고전 12:13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추가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 12:13절 후반의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를 신자 안에서 후속적 사건으로서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경험에 있어 단회적인 경험이요, 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이며 성령 충만은 예수 믿은 후의 성도들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구별되는 제이차적인 세례로 보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신자들을 “완성된 신자”와 “미완성 신자”로 나누어 신자들 간에 화합과 일치를 깨뜨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염려와 위험성이 크다.


2.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3000명에게 성령이 임했다. 그들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고, 단 하나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며, 반복도 상실도 없다. 하지만 성령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며,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결과와 규범을 뜻하며, 반복도 상실도 가능한 것이다. 결국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충만은 반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충만에 관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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