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법시험에 합격하다

 

 

 

1977년 5월 중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전체 합격자수는 80명이었다. 신문을 보고 합격사실을 알았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대방동 매형과 큰누나가 와서 축하해 주었다.

 

큰 매형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국세청에서 근무했다. 충남 청양이 고향이다. 당시 살고 있던 삼양동 집은 아폴로 극장 바로 앞에 있었다.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마당은 거의 없는 편이어서 주로 옥상에 올라가 아령을 들거나 운동을 했다. 지하로 들어가 연탄을 갈아야 했다.

 

만 23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고시였다. 고시에 합격해야 법대에 들어간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것을 미루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은 고시라는 괴물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학문도 운동도 그렇고 사랑도 그랬다. 고시합격은 나에게 하나의 해방선언이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활동할 수 있다는 증서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은 잠시 뿐,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그건 말 못할 고민이었다. 1973년 10월 대학교 2학년 때 동대문 경찰서에서 구류 20일을 받은 처분 때문에 3차 시험 면접에서 떨어뜨리지 않나 하는 걱정이었다. 누구에게 물어 볼 성질도 아니었다. 혼자서 고통스러워했다.

 

3차 시험은 면접이었다. 면접관은 구류처분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나는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면접이 끝나고 최종 발표가 났다. 합격이었다. 과거에는 3차에서 가끔 떨어뜨리는 케이스가 있었다. 왜 떨어뜨리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고 그냥 끝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사히 통과되었다.

 

2017년 6월 21일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이 치러졌다. 사법고시는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가 출발이다. 고등고시 체제로 16번 치렀고 1963년부터는 사법시험으로 바뀌었다.

 

사법시험에는 총 70만8276명이 응시했고, 그 중 2.9%인 2만718명이 합격하였다. 고등고시 사법과 1회 합격자는 16명, 사시 1회는 합격자는 41명이었다. 평균 60점을 넘고 과락이 없어야 합격이 되었다. 합격 인원은 1981년 23회 때 300명을 넘었고, 2001년부터 '1000명 시대가 되었다. 2007년 로스쿨제도가 도입되었다.

 

고시합격기를 써서 월간고시지에 게재했다. 제목은 '고독이라는 창에 비친 자화상'이다. 월간고시에 상법예상문제를 매달 게재했다. 혜명고시원에서 합격자를 위한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 동안 계속 응어리진 마음으로 쳐다보던 하늘이 그렇게 파랗다는 사실을 새삼스렇게 깨달았다.

 

길음동 고갯길에 위치한 혜명고시원 옥상에 올라가면 길음동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 없는 날을 그 옥상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숨도 많이 쉬기도 했다. 기약 없는 공부에 지쳐있는 날도 많았다. 슬럼프에 빠지면 일주일 동안 공부는 못하고 빈둥거렸다.

 

고시합격을 하고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먼저 나를 낳아 길러주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헌신적인 노고, 형제들의 우애, 형수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서울 법대 교수님들, 한양대 김기선 학장님, 정일학원 홍철화 원장님, 혜명고시원 원장 내외분, 나를 도와주신 수많은 분들이 있었다. 합격의 영광은 모두 그 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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