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길음동 혜명고시원에서 공부하다
다 가는 건 아니고, 마음 약한 사람들만 내려간다. 30분 정도는 걸어가야 한다. 밤이고 어두운 산길이라 캄캄해서 손전등을 들고 가야한다. 많이 다녀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부락에 내려가면 관광지라 식당도 많고 술집이나 다방도 몇 군데 있다.
주로 막걸리를 마시거나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 우리가 잘 다니던 다방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그곳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종업원이 한 명 있어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서울에서 와서 혼자 있어 그런지 몹시 외로워했고, 고시공부를 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고생이 심한가, 얼마나 외로운지 물었다. 서른이 넘어서 우리를 동생 취급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돈이 없을 거라고 찻값을 내주기도 했다. 나중에 고시 붙으면 서울에서 좋은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낮에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원당암에는 주말에 등산을 하다가 절구경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다정하게 놀러 다니는 걸 보면,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절에 틀어박혀 청춘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더벅머리에 면도도 제대로 안하고 반은 사회인이고 반은 스님처럼 보이는 모습에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절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는 등산객들 눈에 절에 와 있는 스님 문하생이거나 일꾼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름에 방에 있으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때문이었다. 가끔 노루소리에 놀라기도 했다. 깊은 산 속에 외따로 있는 암자에서는 밤의 고요가 대단했다.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우주 속에 혼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 집에는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지만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끔 집에다 편지를 썼다. 절에서는 신문도 볼 수 없고, TV도 없었다. 전화도 없고, 모든 것이 본의 아니게 통제되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우주와 자연과 법공부이었다. 사람이 그토록 무소유 상태에서 순수해지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고시에 대한 집착보다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강해졌다. 세상 욕심 보다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부모님만 아니면 굳이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생활하는 스님의 얼굴을 보면 나도 저렇게 수양을 해서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에서는 고기류를 금했다. 생선도 금했다. 절음식만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그렇게 먹고 살았다. 물이 달고 맛있었다. 공기도 맑았다. 산 속에서 새와 잠자리, 개구리와 함께 생활했다.
가을에는 서울로 올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혜명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동시에 붙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1977년 3월 사법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렸다. 1차 시험을 완벽하게 대비해서 그런지 쉽게 합격했다.
처음 보는 2차 시험이라 초조했지만, 나름대로 잘 치렀다. 그러나 시험이란 항상 결과가 날 때까지는 불안한 것이다. 2차 시험 결과가 날 때까지 삼양동 집에서 고등학생 과외를 하고 있었다. 매일 옥상에 올라가 아령을 하고 역기를 들었다. 중대한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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