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해인사 원당암에서 공부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 사법시험 1차에서 수석으로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실제로 시험을 잘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합격자 명단에서 빠져있었다. 너무 실망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지금도 나는 왜 떨어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 혹시 채점과정에서 객관식이라 잘못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집안 식구들의 실망 역시 대단히 컸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1차 시험에 떨어져 한번도 2차 시험을 치러보지도 못하고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졸업 후에는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에 적을 두고 혜명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다. 시간은 많고 뚜렷한 자극이 없어서 그런지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빈둥빈둥했다는 표현이 맞다.

 

지금처럼 고시학원이 있었으면 중간 중간에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이 부족한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만 해도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매우 막연한 상태에서 시간만 흐르고 답답하기만 했다.

 

1976년 7월 초 합천 해인사 원당암으로 갔다. 절에는 5명의 고시준비생이 함께 있었다. 작은 방 하나에 한 사람씩 생활했다. 서울에 있으면 어수선해서 공부가 안 되는 상태였는데 조용한 절에 가서 떨어져 있으니 공부하기에 좋았다. 우선 주위에 보이는 것이 없어 신경쓸 일이 없었다.

 

해인사 여름은 정말 시원했다. 계곡으로 목욕을 하러 다니고 가야산에 올라가 호연지기를 키웠다. 매일 저녁 예불을 드렸다. 수양하는 자세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애쓰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부모님이 보내준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그 정성에 보은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조용한 산사에서 나의 갈 길을 확고히 하고 어떠한 난관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굳게 살아 갈 결의를 공고히 했다. 비록 사법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자위를 하면서 성실히 노력할 것을 나 자신에게 거듭 약속했다.

 

이때 함께 원당암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 후 대부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원당암은 대단히 많이 변했다. 커다란 증축공사를 해서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공부했던 작은 방들이 있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2001년 다시 원당암을 방문해서 옛날 내가 공부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깊은 상념에 빠졌다. 암자에는 혜은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공부란 심오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죽으라는 뜻은 아니다. 혜은스님은 큰스님이었다. 입적한 후에 사리가 많이 나왔다. 원당암은 혜은스님의 사리를 보존하고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원당암에서 보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원당암에서 바라보면 앞산이 높이 솟아있다. 절 앞에 급경사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여름에 해가 길어 오후 6시 저녁 공양을 하고 나면 한동안 훤하다. 이때가 제일 심란하다.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단순해진다.

 

그런데 해가 길게 남아 있으면 방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기가 싫었다.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누구 한 사람이 발동을 걸면 공부는 뒷전이 된다. 부락에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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