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신림동에서 생활하다

 

 

 

나는 유치장 감찰을 했던 그 날 밤, 혼자 법대 근처 작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했다. 취한 상태에서 대학로 거리를 걸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노란 은행잎들이 길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유치장에서 나오던 그 날 학교 교정을 가득 덮은 진한 은행잎이 오버랩되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심리적으로 몹시 위축이 되었다. 어려운 고시공부를 해야 하는 부담감 이외에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당시 대학생이 구류처분을 받으면 예외 없이 사법시험 3차 면접에서 탈락시켰다. 성향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최종 합격을 시키지 않았다.

 

필기시험 성적이 좋아도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3차 시험에 합격해도 판사 검사에는 임관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지금과는 달랐다. 1973년은 일 년전에 유신체제가 시작된 직후였다. 매우 살벌한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고시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딛히게 되었다. 고시공부 자체도 매우 어렵다. 그 경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선배들이 5년 내지 10년씩 계속해서 공부해도 떨어지는 판이었다. 일년에 50명 내지 60명을 뽑는 시험이었다.

 

경제적 사정도 어려운데 구류처분이라는 핸디캡까지 안고 그 어려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머리를 짓누르게 되었다. 참으로 힘든 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내가 만든 상황이었다.

 

과외지도는 생활이고 습관이었다. 집안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리하게 건축을 했던 후유증으로 우리 집은 채권자에 의해 처분되었고, 대전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신림동에 있는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었다. 8식구가 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신림동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공사를 한참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과 함께 한방에서 한 달가량을 보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나중에 막내 여동생 영주와 결혼했다. 우리 집에서 함께 2달 정도 생활을 하고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나중에 영주가 대학교 졸업반 때 인숙이와 명동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성주를 만났다.

 

성주와 영주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인숙이가 혹시 성주오빠 아닌가 하고 다시 쫒아가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 영주 졸업식 때 성주가 참석하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성주와 영주는 결혼하게 되었다.

 

1974년 3월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신림동에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때 많이 들었던 색스폰 연주곡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끔 서울대 신축공사를 하는 관악산을 바람을 쐬러 갔다. 황량한 벌판에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었다.

 

가을에 신림동에서 미아리 대지극장 앞으로 이사를 했다. 형수가 들어왔다. 1974년 11월 4일 서울 도봉구 미아동 734의 245번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단독주택으로서 한옥 형태로 되어 있는 집이었다. 그 집을 전세로 얻어 갔다. 신림동 살 때보다는 훨씬 양반이었다.

 

법대생이란 취업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시준비가 전부였다. 학교에서 학점을 따는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내에 고시를 붙는 것이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고시공부에 집중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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