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유치장 생활을 통해 배운 것

 

 

 

도대체 말이 되는가? 우리는 법대생이었지만, 구류처분이라든가, 그에 대한 불복방법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서울법대생이 이 정도인데 도대체 법을 모르는 일반인은 어떨까? 그게 당시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판사는 불복절차를 알려주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경찰관이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백지에 무인을 받아 놓고 그 위에 ‘정식재판을 포기함’이라고 써넣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유치장에서 꼬박 20일을 보내야 했다.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유치인들은 서울법대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잘 대해주었다. 전혀 괴롭히지도 않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모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나는 절망했다. 괴로워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우연한 일로 내 인생의 방향이 180도 달라지게 된 것을 실감했다.

 

학교에서는 징계가 있을 것 같았다.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 고시공부는 끝인 것 같았다. 나에게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던 부모님과 형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주었다.

 

20일을 견뎌내는 것도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도수가 높은 근시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유치장 안에서는 안경이나 허리띠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안경을 못 쓰게 하니 답답했다.

 

하루 종일 좁은 감방 안에서 생활하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유치장에서는 새벽 6시에 모두 잠을 깨웠다.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정자세로 앉아있어야 했다. 바닥에 누워 있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규율을 잡기 위해 유치장 간수는 때때로 창살타기를 시켰다. 창살에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힘든 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진다. 절도와 폭력, 교통사고로 들어온 다른 사람들 역시 절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유치장에서 앞으로 전개될 일을 상상하면서 몹시 억울해 했다. 한 순간에 이렇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다. 군대 끌려가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모든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하니 정말 답답했다.

 

1973년 10월 28일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었다. 아버님이 대전에서 올라오시고 형과 둘째 누나가 왔다. 관행에 따라 두부를 먹었다. 두 번 다시 유치장에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정말 아버님께 죄송스러웠다. 지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서울로 보내 공부를 하도록 해주셨던 아버님을, 경찰서에서 만나니 면목이 없었다.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아버님은 내가 1971년 1월 대학교 입시에서 떨어졌을 때도 크게 실망하셨을 것이다. 당시 합격자발표는 대전고등학교에 직접 가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아버님이 혼자 학교에 가서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셨다.

 

나는 집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오셨는데 표정이 담담하셨다.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아버님은 웃으시면서, “김주덕은 없고, 대신 김주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렇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유치장 안에서 보낸 20일은 나에게 많은 세상 경험을 보태주었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가지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그 후 내가 살아가면서 많은 업보를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악하거나 나쁜 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유치장 생활은 나를 낮은 위치로 내려놓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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