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구류처분을 받다
내가 1973년 5월과 6월에 집중적으로 쓴 일기장을 보니, '집심견인, 범사가신'이라고 쓰여있다. 또 '네 인생의 참모습은 미래에 있다. 현재의 상태는 과정, 일시적인 과정이다. '인내하라. 노력하라. 결코 슬퍼하지 말아라. 바쁜 벌은 슬퍼할 여유가 없나니.(1973년 5월 17일)'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강행하였다. 그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데모가 시작되었다.
1973년 9월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기분으로 2학년 2학기를 맞았다. 제대로 고시공부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데모에 참가했다.
한번은 데모 행렬 선두에 섰다가 경찰 진압을 피해 학교 앞 개천으로 뛰어 내려 도망친 적도 있었다. 당시 법대와 문리대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개천이 보이지 않는다.
데모 시위중의 흥분상태는 사람을 매우 격앙시켰다.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는 공부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주동자는 아니고 단순가담자 정도였지만, 학교에 나가면 공부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1973년 10월 8일,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날도 데모 대열에 끼어 데모를 하다가 저녁 때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동숭동 학교 부근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데모할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집주인이 신고하여 경찰이 출동하게 되고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한 친구가 경찰관에게 "박정희면 다냐!"는 등의 언행을 하면서 대들었다. 평소 데모 행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가했던 우리 세 사람은 경찰관에게 나쁘게 보였고, 마침 잘 됐다 싶었던 경찰에 의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당시 응암동에 있던 즉결심판소에 호송되어 우리는 구류처분을 받았다. 친구 한 명은 구류 29일을 받았고, 나와 다른 친구는 구류 20일을 받았다.
즉결심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별 말도 없이 그냥 구류처분을 했다. 우리 세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모두 서울 법대 72학번 동기생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법집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엉터리로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리 유신체제라고 하지만 대학생을 이런 식으로 구류처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
한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형벌권의 행사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많은 업보를 쌓는 것이다. 그 업보의 인과관계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처분되자 상황은 갑자기 복잡해졌다. 입주과외선생이 아무 연락도 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학생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갑자기 선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짐을 동숭아파트로 옮겼다. 며칠 후 대전에서 아버님이 올라오셨다. 경찰서에서 면회를 했다. 면목이 없었다.
서울 가서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대견해 하던 아버님께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대범하셨다. 그냥 잘 견뎌내라는 말씀만 하셨다. 면회 시간은 아주 짧았다.
정식재판을 청구하려고 신도순 아저씨가 알아보았으나, 경찰관은 내 무인을 백지에 받은 다음 그 위에 ‘정식재판을 포기함’이라는 글을 내 대신 써 넣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저씨는 어머니 친척이다. 신덕순 아저씨의 동생이다. 대전에서 아버님과 사업을 함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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