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학 생활에 복귀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고, 자신감을 상실했다. 친구들이 아무 일 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왜 그런 상황에 빠졌을까 하는 후회와 회한이 늘 가슴 속에 사무쳤다. 세상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다가 갑자기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풀려 나온 뒤 나는 곧 바로 학교로 갔다. 20일 간의 공백은 어떻게 나를 달라지게 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당연히 징계조치가 된 줄 알았다. 아니면 군대징집영장이 나온 줄 알았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다만, 20일간 수업을 듣지 못했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몸을 추스렸다.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친구들은 내가 학생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쑥덕거렸다. 탄압을 받은 반발로 조직적인 학생운동조직에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엉망이 된 몸을 바로 잡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해 과외를 해야 했다. 뒤떨어진 수업을 쫓아가느라 바빴다. 본의 아니게 그만 두게 된 입주과외도 학생과 부모님에게 사과하고 나왔다.
10월말의 은행잎은 정말 노랗다. 유치장에서 나와 학교 캠퍼스를 가서 본 은행잎이 그렇게 진한 노란색인 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도 해마다 10월이 되어 은행잎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82년 10월 나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 감찰을 나갔다. 내가 유치인으로 수감되어 있던 경찰서에 이번에는 검사 자격으로 가게 된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그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검사 수가 많지 않았다. 유치장감찰을 가면 초임검사도 경찰서장실에 들러 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수사과장 안내를 받아 감찰을 했다. 당시에는 동대문경찰서가 종로에 있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관할이었다. 그후 종로에 있는 동대문경찰서는 혜화경찰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청량리경찰서는 동대문경찰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치장에 들어가는 순간 악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수감되어 있는 유치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칠판에 쓰여진 죄명과 이름을 대비해 가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절망했던 곳, 한을 묻었던 곳, 질식할 것 같던 곳, 대전에서 올라오신 힘없는 아버님과 만나 고개를 떨구던 곳. 그런 모든 기억들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다.
나는 유치장 감찰시 억울한 사람들이 구속되었는지 각별히 유념하였다.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 나이 어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특별면담을 했다. 수감된 이유와 부모님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내 임무였다. 구속된 사람들이 모두 나쁜 건 아니다. 모두 죄를 지은 건 아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해 과다하게 처벌되고 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이런 사실은 내가 학생 시절 유치장에 20일 동안이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얻은 진리였다. 16년간의 검사생활을 통해서 그 진리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찰관이 잘 몰라 그렇든, 검사가 성의 없어서 그렇든, 판사가 현실을 몰라 그렇든, 구체적인 사건에서 정의가 왜곡되는 경우는 많다. 법집행기관의 불성실, 무책임한 자세로 한 인간의 운명은 파괴된다. 불행이 초래된다. 수많은 가족들의 운명이 뒤바뀐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정의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내가 유치장에서 수없이 되새긴 진리였고 명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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