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학교 2학년 시절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느꼈던 서울의 낯선 풍경이다. 넓은 재벌 집에서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과외선생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선생님이었다. 이미 성북동에서 경험을 했지만, 이곳은 전혀 달랐다.

 

마당에서 야구공을 던지며 놀 정도의 잔디밭이 있다. 산 바로 밑에 있는 집 정원에서 저녁 식사 후 흔들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내가 어떻게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이상했다. 우연한 기회에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운명이란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달라지게 된다.

 

대학 시절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주로 교련복을 입거나 아주 편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 머리는 터벅머리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공부만 하고 멋을 부릴 줄 모르고 세상도 잘 모르는 순진한 학생이었다. 그런 지방 학생이 너무 달라진 환경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끔 만들었다.

 

과외지도하는 학생과 형 동생 하면서 편하게 지냈다. 그는 내가 과외지도한 학생들 순번으로 12번째 되는 학생이었다. 공부를 하기 싫어했고, 공부에는 마음이 없는 상태라 지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꼭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환경이었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함께 생활해 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입장이었다. 학생도 그걸 원했다.

 

학생이 저녁 시간에 돌아다니다 늦게 돌아오면 그 시간 혼자서 내 공부를 했다. 학생은 무척 외로움을 탔다. 나는 그 외로움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배가 고프면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먹을 것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서 날계란을 두개씩 꺼내 먹었다. 그것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간장이나 소금을 찾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가정부 도우미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밤마다 날계란을 먹을까? 그걸 물어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날계란을 먹을 때 느꼈던 고소한 맛을 잊지 못한다.

 

재벌집 사람들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집안 행사가 있으면 자가용이 20대나 왔다. 당시에는 자가용이란 거의 보기 어려웠다. 내가 지도하는 학생 형은 대학에 다니면서 승마를 하러 다녔다. 학생은 나와 두살 차이였는데 비교적 순수했다. 내 말을 잘 들었고, 내가 수학문제를 풀면 감탄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서 나는 학생과 함께 단양으로 갔다. 그곳에 계열회사 귀빈 숙소가 있었다. 더운 여름 머리도 식힐 겸 그곳에서 공부를 하려고 내려갔다. 회장 아들과 함께 내려가니 공장장부터 직원들이 대접을 잘 해주었다.

 

공부하러 단양에 내려간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학생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고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 나는 단양지역을 관할하는 지청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이 무렵 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혜화동 로타리에 있는 엘리음악학원에 등록해서 기타를 배우러 다녔다. 클래식 기타에 반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열심히 연습했다.

 

도중에 그만 두었지만, 만약 그때 더 열심히 기타를 쳤으면 고시는 떨어졌을 것이다. 기타 선생이 치던 알함브라의 궁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태권도반과 역도반에 들어가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법률공부를 해야 할 사람이 왜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느냐는 질책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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