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72)
김현식은 무엇 때문에 검찰청에 직접 와서 회사에 대한 범죄정보를 주려는 것일까? 그는 정현에게는 그냥 사회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현식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 군데 직장을 거쳐서 이 회사로 와서 경리업무를 맡았다. 42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격이 상당히 내성적이고, 여자에 대해 무뚝뚝하고 자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 몇 명의 여자를 만나 데이트도 했지만, 모두 여자쪽에서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결별을 선언했다.
그때마다 현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견실한 직장에서 월급도 많이 받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인물도 보통이고, 체격도 보통이다. 성적 능력도 보통의 남자들보다는 낫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면 돈도 쓸만큼 쓴다. 그런데도 한 두달 지나면 여자들은 현식을 싫어한다. 만나면 아무 재미도 없어 지루해하고, 빨리 집에 가려고 한다. 그 이유를 현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3개월 전에 같은 회사에서 비서실에 근무하는 정영미를 좋아하게 되었다. 영미는 35살이었다. 사장 비서로서 오래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어느 날 회사 직원들이 회식을 하고 2차로 술을 마시러갔다. 그날 현식은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다. 술에 취해 회식장소에서 혼자 밖으로 나와 비틀거리면서 걸아가고 있었다. 현식은 큰 건물 앞에 앉아 술에 취해 토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영미가 지나가다 현식을 발견했다. 영미는 아직 일행이 술집에 있었는데, 오래 있기기 그래서 먼저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영미는 나이 들어 결혼도 하지 못하고 회사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현식이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현식을 택시에 태우고 같이 현식의 집까지 갔다. 그 다음 날 그런 사실을 알고 현식은 영미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백화점 상품권 50만원 어치를 사서 주었다.
물론 영미는 받지 않았다. 그 대신 현식에게 저녁을 한 번 사라고 했다. 그 때문에 몇 번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서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다. 영미는 단지 인간적으로 불쌍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현식을 좋게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현식은 그런 영미를 오해하고 영미도 현식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한번 좋은 감정이 생기자, 현식은 회사에 출근하면 모든 신경이 영미에게 가 있었다. 그리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몇 번은 영미의 얼굴을 보아야했고, 말을 걸어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런데 사장이 갑자기 영미에게 눈독을 들였는지, 추근덕 거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장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영미를 데리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일이 많아졌고, 영미는 현식이 식사를 하자고 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퇴근시간에 현식은 영미를 따라가서 만났다. 싫다는 영미를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식사를 하러 갔다. 그 자리에서 영미는 평소와 달리 취하고 싶었는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면서 사장이 자꾸 귀찮게 해서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말을 했다. 현식은 흥분했다.
“아니, 늙은 사장이 왜 그래요?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면 어떻게 해요?”
“사장님이 망령이 들었나 봐요. 자꾸 추근덕 거려요.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따라가면, 자신이 사업에서는 성공했지만, 사랑에는 실패한 패배자라고 되풀이하면서 제가 자꾸 좋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해요. 그래서 제가 저는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냉냉한 태도로 나와요. 그러다가 며칠 지나면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거예요.”
“그거, 직장 내 성희롱 아니예요? 몸에도 손을 대고 그러던가요?”
“몸에 직접 신체접촉을 하지는 않아요. 다만 사장실에 들어가면 제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나올 때는 제 히프만 보는 거예요. 눈빛이 아주 음탕하고, 음성도 게슴츠레하고, 아주 징그러워요.”
“왜 더 단호하게 의사표시를 하지 그래요?”
“글쎄요. 이론상을 그래야겠지만, 만일 그랬다가는 이 회사에서 더 이상 근무를 못하게 되잖아요? 이 나이에 지금처럼 편한 직장을 다시 구할 수도 없을 테고, 직장 상사와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퇴사하면 다른 회사에서도 채용하지 않을 것도 걱정이예요. 그래서 더 참고 사장이 제 정신으로 돌아올 것을 기다려보는 중이예요.”
“영미 씨는 왜 결혼하지 않고 있어요?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비밀이예요.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요. 쓸데 없는 질문해서 미안해요.”
현식은 이런 대화를 통해 더욱 영미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섣불리 사랑을 고백할 상황도 아니었다.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미친 사람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식의 영미에 대한 사랑은 저 혼자 타들어갔다. 아주 뜨겁게, 뜨겁게 저 혼자 불꽃을 피우는 불나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현식은 영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자 영미도 특별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본격적인 데이트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은 영미를 데리고 저녁 식사를 갔다가 노골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다. 영미는 흔들렸다. 나이 들고 무능력한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에 직장을 쫓겨나서는 곤란할 것 같았고, 사장의 요구를 들어주면 일단 경제적 혜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미는 현식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소문대로 현식은 성격이 남자답지 못하고 너무 내성적이면서 여자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영미는 사장이 원하는 대로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셔주는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직 육체적 관계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나이 차가 무려 30살이나 나는 늙은 사장,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와 몸을 섞는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사장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 또는 비계덩어리로 전락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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