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64)

 

최 사장은 처음 캐디 장옥경을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같이 원단장사를 하는 친구들과 넷이서 골프를 치러나갔다. 늦가을이었다. 단풍이 새빨갛게 물들고, 은행잎이 노랗게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높은 하늘은 파랗게 선명했다. ‘빨강, 노랑, 파랑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강한 색깔이었다.

 

그런 극명한 선명함 앞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한 삶일까? 무한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개미와 같다. 개미는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하루를 기어다녀도, 십리를 못간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는불쌍한 존재인 인간은,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미물과 똑같이 십리를 가지 못한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점에서는 최 사장은 개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숨을 쉬고, 움직이고, 무언가 먹고, 먹은 것을 배설하는 것은 같았다. 최 사장은 궁금했다. ‘개미도 사랑할 수 있을까?’

 

개미의 사랑은 이성적으로는 와닿지 않았다. 개미는 딱딱한 껍질에 쌓여있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은 부드럽고 피가 통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는 최 사장도 개미였다. 부드러움은 실종되었고, 피는 정지했다. 딱딱한 껍질과 혈액의 불순환은 사랑의 부존재를 의미했다.

 

최 사장은 그래서 더욱 골프에 열중하려고 했다. 특히 오늘은 친구들과 돈내기를 하는 날이다. 적지 않는 돈을 걸었기 때문에 골프에만 전념해야 했다. 캐디에게도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돈내기를 하면 골프처럼 재미 있는 것은 없다. 4시간이 아주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너무 힘이 들어가서 오비를 내거나, 수풀속으로 공이 들어가거나, 해저드에 빠지면 큰 일이다.

 

같은 플레이어가 오비를 내면, 기분이 좋다. 겉으로는 안 됐다고 위로해주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다. 자신이 홀인원하는 것보다 옆 사람이 오비를 내고 더불파를 하는 게 훨씬 좋다. 그게 게임하는 사람들의 기본 심리다.

 

오늘은 한 타당 5만원 내기를 했다.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에 캐디가 배정되었다. 옥경은 작은 체격에 얼굴이 선하게 생겼다. 최 사장은 게임 때문에 캐디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첫눈에 들어왔다.

 

옥경도 최 사장에게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배려를 해주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게임에서 이기기를 바랬다. 최 사장이 나이스샷을 날리면 옥경도 좋아하고, 모래밭으로 들어가면 속상해했다.

 

그 날 최 사장은 100만원을 땄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컨디션으로서는 최소한 100만원은 잃겠다는 예감을 했으나, 결과는 거꾸로 100만원을 땄다. 순간적으로 최 사장은 옥경이라는 캐디를 잘 만나서 재수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돈을 많이 딴 것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옥경의 무언의 응원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 사장은 50만원을 옥경에게 주었다. 원래 골프장 규정상 캐디가 플레이어로부터 이런 돈내기에서 딴 돈을 받는 것은 금지되었으나, 옥경은 그냥 받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은밀하게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서 라운딩 내내 별로 말이 없고, 오직 경기에만 집중하는 최 사장의 인상이 매우 좋게 가슴에 와닿았다.

 

그것은 상대적이었다. 최 사장과 같이 라운딩하는 다른 세 사람이 너무 말이 많고, 천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은 모두 원단장사를 하는 사람들로서 돈은 제법 버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선 캐디에 대한 말버릇이 나빴다.

 

무조건 반말이고, 골프를 치는 게 무슨 사회에서 가장 엘리트계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너무 심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게임이 잘 안풀리면 인상을 쓰고, 표정이 완전히 굳어져서 마치 밤길에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오비를 내면 너무 좋아하다가 생수가 목에 걸려 급사할 것처럼 보였다. 이에 반해 최 사장은 무척 젊잖고 겸손했다. 캐디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다. 매일 일을 하니 얼마나 힘이 드냐고 위로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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