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선택
오후에 남산에 갔다. 국립극장 앞에서 출발해서 북측순환도로를 따라 산책을 했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북측순환도로는 내가 좋아하는 코스로서 차량통제가 되어 있는 구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라톤을 한다. 유니폼을 입고 씩씩하게 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삶의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왕복 6킬로미터의 산책로다. 나도 조금 뛰어보았다. 역시 뛰는 일은 무척 힘이 든다. 그래도 뛰다 걷다 하니 땀도 나고 좋았다. 추운 날씨지만 밖으로 나오니 가슴 속이 시원해졌다. 답답한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중간에 벤치에 앉아 차를 마셨다. 보온병의 따뜻함이 손에 전해졌다. 그것은 사랑의 느낌이었다.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추운 겨울날 갑자기 내 몸을 녹여주는 온기! 그것이 작던 크던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는 포근함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추운 곳에 있지만, 어딘가에 사랑이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그 추위를 견딜 수 있다.
주변의 나무들을 돌아보았다. 벤치 위에도 낙엽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낙엽을 치우지 않고 그 위에 앉았다. 낙엽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그들은 이미 가을의 낙엽이 아니었다. 겨울의 낙엽은 또 다른 것이었다. 가을의 정취는 사라지고, 겨울만 남아 있었다.
약간은 쌀쌀했지만 겨울의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겨울의 벤치란 낭만이라기 보다는 긴장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랑과 미움의 대치상태인 것처럼 우리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앉아 있는 동안에도 곧 떠나야 할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과 미움은 수시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게 된다. 미움이 사라지면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과 미움은 똑 같이 우리의 감정이고 생각이다. 사랑했던만큼 미움도 강할 것이다.
순환도로는 푹신푹신한 부분과 딱딱한 부분으로 구별되어 있다. 아스팔트는 갈색으로, 조깅로는 녹색으로 나누어 놓았다. 발의 촉감이 전혀 다르다. 삶의 길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부드러운 부분과 딱딱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두 길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커피를 파는 두곳에도 아저씨, 아주머니가 나와있지 않았다. 대신 낙엽을 쓸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혼자서 추운 날씨에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까? 바람에 날린 낙엽들을 한곳에 모으는 일이란 정말 힘들어 보였다. 그 넓은 길에서 낙엽을 한쪽으로 치운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흰지팡이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중간에 필동가는길로 내려갔다. 순환도로 바로 밑에 동네가 있다.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공기도 좋은 곳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제는 겨울과 많이 친해졌다. 겨울에 맞추어 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사랑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적인 사랑은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다. 그 길은 선택한 이상 그는 그 길에 전념을 해야 한다. 한눈을 파는 것은 위험하다. 오직 자신이 선택한 길에 초점을 맞추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솔한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