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2)
시청 공무원인 소종각(45세, 가명)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벽에 세게 박아서 몹시 아팠던 모양이었다. 오른 손은 계속 종각의 머리에 대고 누르고 있었다. 반미술(28세, 가명)은 겁에 질려 가만히 있었다.
미술은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남자가 이런 사고방식과 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 정말 무섭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종각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술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장님. 저는 먼저 나가볼 게요. 머리도 아프고, 속이 많이 아파요. 죄송해요.” 종각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뭐라고! 먼저 간다고. 이렇게 큰 일을 저질러놓고, 너만 살겠다는 거야!”
미술은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장이 되었다. 술집 마담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다. 종각은 미술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술이 거의 다 깬 것처럼 보이는 종각은 침대 시트를 거두고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시트 위에는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미술은 사실 생리는 아니었다. 그건 이틀 전에 이미 끝났다. 마담에게 이차를 나오기 싫어서 생리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시트 위에 피가 약간 보인 것이었다. 종각은 미술을 보면서 물었다.
“이건 뭐야? 아니 생리까지 하면서 나와 관계를 하려고 했던 거야? 도대체 나를 뭐로 보고 이런 더러운 짓을 했어?”
“사장님. 아니예요. 생리는 며칠 전에 끝났어요. 생리중이면 생리대를 차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었을 거 아니예요.”
미술은 순간적으로 마담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네가 만일 생리 때문에 남자가 피를 보게 되면, 처녀로 처음 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확실하게 해야 해.”
미술은 마담이 말한 대로 첫경험(one's first sexual intercourse)이라고 말할까 했다. 그런데, 잘못 거짓말을 했다가는 흥분한 남자가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종각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생리가 아니면, 그럼 나와 처음 한 거라는 이야기야? 분명하게 말해 줘.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
“예. 사장님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이 없었어요. 오늘 처음 마담이 강요해서 사장님을 따라나왔던 거고, 사장님이 이상하게 남자답고 마음에 들어서 사장님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제 처녀성을 사장님께 바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저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이었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자, 미술은 갑자기 서러워서 그랬는지 눈물이 쏟아졌다. 훌쩍이면서 한참을 울었다. 모든 것은 거짓이었지만, 그래도 여자가 그런 거짓말을 남자 앞에서 하니까 이상하게 서러움이 북받쳤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미술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남자에게 첫순정을 바친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과 몸을 섞었던 그 남자가 이상하게 멋있게 보이고, 고결하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마취제를 투입한 것처럼, 그 남자의 속정이 자신의 몸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와서 자신을 ‘정(情)의 노예(奴隸)’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미술은 갑자기 지나간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미술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했다. 머리도 좋고, 대학교 때 성적도 우수했다. 곧 바로 고시에 합격할 것으로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대를 했는데, 이상하게 아버지는 꼭 한 과목 과락으로 시험에 떨어졌다. 그것도 그 전해에는 최고 점수 수준으로 시험을 잘 보았던 과목에서 그 다음 해에는 과락으로 떨어졌다.
과락도 39점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채점 위원이 과목 당 세 사람이었는데, 누군가 3점을 덜 주었기 때문에 평균 39점으로 1점이 부족해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낙방이 몇 번 되풀이되다 보니, 시험 공부를 할 때에도 이런 노이로제와 트라우마가 아버지를 짓눌렀다. 그래서 아버지는 책을 읽어도 글씨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글씨가 겹쳐서 들어왔다. 숫자도 이상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6과 9가 잘못 읽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한 날짜가 1979년 10월 26일이었는데, 종각의 눈에는 1676년 10월 29일로 읽히는 것이었다.
이렇게 1979년을 1676년으로 읽고, 암기하고 있으면 시험에서는 100%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1676년을 돌이켜보면, 단기 4009년에 해당하고, 불기 2220년에 해당한다.
1676년은 1979년과는 달라서, 청나라로서는 강희제(康熙帝)가 군림하고 있었고, 조선으로서는 숙종(肅宗) 2년에 해당하는 해이었다. 로마 교황 클레멘스가 그 해 사망하고, 인노첸시오 11세가 240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한 역사적인 해다.
그런데 로마에서 교황이 사망한 해에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것으로 암기를 했다면 채점 위원이 답안지를 보면서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 채점 위원은 그런 답안지를 심신상실자가 정신병원을 탈출해서 몰래 시험을 본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아니면, 중국 청나라 강희제 때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부활하여 대한민국에서 고시를 준비하고 시험장에 나온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채점위원 세 사람은 이런 기이한 답안지를 보고, 혹시 죽은 귀신이 그 답안지에 붙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채점위원들에게 달라붙었을까 두려워서 무당을 찾아가서 불쌍하게 죽어서 구천을 떠돌고 있는 영혼을 위한 진혼제를 비싼 경비를 들여서 합동으로 지내고 그런 다음 싸우나 고온 열탕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했다.
그렇게 해도 불안하니까 비록 코로나 감염병 때문에 위험하기는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세 사람이 삼겹살집에 가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1인당 10병씩 단숨에 들이키고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갈 때에도 마트에서 굵은 소금을 사서 세 사람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리고 들어갔다. 누가 보면,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져서 우산 없이 맞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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