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3)

 

반미술은 아버지 반합격(潘合格, 70, 가명)42살에 태어났다. 미술이 태어날 때까지 아버지는 만년고시생이었다. 신림동 터줏대감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다닐 때 천재 소리를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는 지방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5살 때 이미 천자문(千字文)을 다 뗐다고 한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그 집안의 종중 사람들은 합격이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적어도 율곡(栗谷) 이이나 退溪 이황 이상으로 유명한 한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으면 정약용이나 송시열 정도가 되었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한문이나 한학보다 영어나 수학을 가지고 우열을 가리니 너무 안타까웠다.

 

그 후에 정부에서는 한글전용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한문 가지고 폼을 잡지 못하게 하니까, 애써 한문 배워서 붓글씨 쓰고, 한시도 짓고 하던 사람들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합격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한학을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동학혁명비슷하게 정권을 뒤집는 혁명(revolution)을 모의해 보았는데, 혁명지지자가 100명쯤 모였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쿠테타음모가 들통이 났다.

 

그래서 혁명 모의자 100명 중 주모자 20명은 모두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속으로 피신했다. 이때 합격의 할아버지는 혁명주동자이었지만,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게 마을을 지켰다. 자신이 사형을 당해도 비겁하게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관군이 혁명군을 진압하러 오면, 집에 있는 낫과 도끼, 멧돼지 잡으려고 준비한 사냥총, 그리고 훈련시킨 진돗개 5마리를 가지고 결사항전을 할 생각이었다.

 

할아버지는 관군과 장기전을 벌일 경우를 대비해서 비상식량도 준비했다. 10가마, 보릿쌀 5가마, 고추장과 된장 각 한 장독분, 짱아찌 한 박스, 라면 10박스, 옛날 추억의 건빵 한 박스, 콘돔과 생리대(여성 대원용) 등을 비축해놓았다. 혁명군 상호 간에 연락할 암호는 한자 초서체를 쓰기로 했다.

 

암구호는 <한문> - <최고>였다. 이쪽에서 먼저 <한문>이라고 암호를 말했는데, 상대방이 <최고>라고 답변하면 아군인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최고>라고 하지 않고, <한글>이라고 하든가, <chinese>라고 하면 즉시 공격해서 사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비장한 각오를 했고, 만약을 대비해서 유서까지 써놓았다. 유서(遺書)는 물론 모두 한문으로 썼다. 한지에 붓으로 썼는데, 너무 많이 써서, 모두 100장에 걸쳐서 썼다.

 

너무 정성들여서 쓰다보니, 유서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짓는데, 보름이 걸렸다. 측근들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유서 쓰는데 시간을 빼앗기면 정부군과 전투는 어떻게 하느냐고 진언을 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유서 쓰다가 측근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유서의 일부를 잘못 썼다. 그냥 붓으로 덧칠을 해서 한 글자를 고치면 되는데, 워낙 꼼꼼하고 빈틈이 없는 할아버지는 매우 위급한 상황임에도 그때까지 쓴 유서 25장을 모두 찢어서 불에 태워버렸다.

 

유서를 한 밤중에 태웠기 때문에, 밤하늘에 불길이 치솟아 정부진압군이 혁명군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봐 걱정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의연하게 유서를 더욱 정성 들여 써나갔다.

 

할아버지는 그 동네가 몇백년 후에 성지(聖地)가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의 쿠테타음모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정부군은 집압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신문에도 보도가 되지 않았다. 동굴속으로 들어간 일부 혁명동지들 중 일부는 체중이 절반으로 줄기도 했다. 몇 사람은 위급상황이 되어 119에 실려가기도 했다. 혁명군에게는 만일 도피 중 사망하게 되는 경우에는 메르스나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고 사망원인을 위장하라는 공문도 내려왔다.

 

물론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있기 때문에 정부군에서는 그런 내용의 공문을 해독할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쿠테타음모사건이 폭로된 후 100일째 되는 날, 마침내 혁명주동세력은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더 이상 정부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모든 혁명군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교시했다.

 

그 이유는 한국 정부에서 한문을 경시하는 태도에 대해 중국 정부에서 강력하게 항의했고, 만일 무력으로 혁명군을 진압하게 되면, 6.25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군이 한국을 무력침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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