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4)
반미술의 아버지 반합격(潘合格, 70세, 가명)의 이름도 한학에 정통한 미술의 할아버지 반한문(潘漢文, 99세, 가명) 선생이 지어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한자(潘漢字)로 하려다가 부자지간에 같은 한(漢) 자가 들어있으면 마치 형제간에 돌림자를 쓰는 것처럼 오해가 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가운데 한(漢) 자를 쓰지 않기 위해서 아들 이름을 합격(合格)으로 지었다.
면사무소 호적 담당 직원이 할아버지에게 이름이 <합격>이면 앞으로 아들이 보게 될 모든 시험에서 합격해야 할 텐데, 만일 한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이름을 <불합격> 또는 <낙방>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워자절대합격, 워자절대낙방(我子絶對合格, 我子絶對落榜)>. 면사무소 직원도 동네 서당에 몇 달 다녔기 때문에 한문을 조금 배웠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이렇게 어려운 한문으로 자기 아들 이름에 대해 설명하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면사무소 직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아들 국적을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고, <중화민국>이라고 썼다가 아니다 싶어서, <청나라>로 썼다.
그런데 면사무소 직원이 <청나라>는 이미 망하고, <모택동>이라는 이상한 모자 쓴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기 때문에, 다시 <대한제국>이라고 써서 결재를 올렸다.
면장은 마침 점심 시간에 동네 유지들과 <면발전종합대책>을 논의하다가 극렬한 설전이 벌어져서 유지들을 달래기 위해서 밀주로 담은 막걸리를 여덟 사발을 마시고 들어와 의자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호적담당직원이 급한 결재라고 들이대기에 잘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결재를 해버렸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한국 영토에 들어와서 호적까지 출생신고를 했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는데, 이 면에서 최초의 신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그대로 넘어갔다가 할아버지 아들인 반합격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들통이 나서 그 지역 엉터리신문기자가 대서특필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 신문기자도 할아버지를 만나서 설명을 듣고 곧 바로 정정기사를 내주었다. 할아버지는 <漢文天才國籍 大韓帝國正當, 時代變化勘案 大韓民國修正>라고 초서체로 써서 그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그 기자는 할아버지가 써준 글씨를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붓글씨가 너무 멋있고, 예술적 가치가 있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돈이 될 것 같았다. TV <진품명품> 프로에 가지고 나가면 적어도 천만원은 감정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기자는 내용을 전혀 모르지만, 마치 자신도 한문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기자는 <당신자식최고(當身子息最高)>라고 한문으로 쓰지는 못하고 한국어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기자가 <당신>이라는 반말을 쓰고, 또한 장래 과거에 장원급제할 귀한 아들을, <자식>이라고 낮추어 부르니까 화가 치밀었지만, 어린 아들 <고종>을 막후섭정하던 <대원군>의 어려운 입장을 떠올리면서 참고 인내심을 가지고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엉터리 한자말이 통했다는데 대만족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써준 글씨를 받아가지고 와서 비싼 돈을 들여서 액자로 만들어 신문사 회의실에 걸어놓았다.
이런 연유로 영광스럽게도 <합격>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반합격은 일찍이 천자문을 뗀 것을 비롯해서 계속해서 할아버지 지도를 받아 한문과 한학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에서 한글전용정책을 발표하고, 한문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자, 합격은 주특기를 발휘할 기회를 상실하고, 그 대신 영어와 수학, 국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문을 숭상하고 한글은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아들인 반합격이 국어를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유교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아들이 집에 가져다놓은 <성경>책도 불에 태워버렸다. 불에 태운 다음 그 재를 집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개울가에 묻어버렸다.
반합격은 이런 구태의연한 아버지의 박해를 받아가면서 몰래 반딧불 아래서 <국어>공부를 해야했다. 할아버지는 <국어>만 박해를 했지, <영어>나 <수학>에 대해서는 관용정책을 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할아버지는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헬로우, 기브 미 껌!> <땡큐> 정도는 해야 남들보다 껌이나 초콜렛을 얻을 수 있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미군들에게, <미군호의대단감사 당신미남부자(美軍好意大壇感謝 當身美男富者>라고 아무리 유식하게 말해도 미군은 할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고, 오히려 말도 되지 않는, <얄로! 껌! 오께!>라고 다섯 음절을 떠드는 유치한 아이들에게 껌과 초콜렛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영어가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다.
그리고 수학은 처음에는 <산수>로 시작했는데, 아들을 데리고 오일장 시장에 가서 물건값 계산하는 것을 보니, 역시 산수가 실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다. 그 전에는 할아버지는 면에서 장이 설 때, 어떤 미모의 할머니가 주인인 주막집에 가서 막걸리와 빈대떡 안주를 먹고 외상으로 달아놓고 있다가 2개월에 한번씩 일괄결제를 하였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할아버지 외상값을 벽지 위에 표시를 해놓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외상값을 갚으면 그림을 지우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막걸리 한병은 막대기 하나, 빈대떡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외상값이 변제가 되면, 주인 할머니는 막대기 하나를 <X>표시를 하고, 동그라미에는 가운데 까만 숯으로 칠해놓았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하다 보니 자꾸 분쟁이 생겼다. 할머니도 같이 막걸리를 마신 날에는 막대기나 동그라미 그리는 것을 까먹기도 하고, 숯으로 칠해놓은 동그라미 안의 칠이 흐려져서 그냥 맨동그라미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쟁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매번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할머니가 미스 <대한제국>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 없어 진위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는 일찍이 처녀 때 한양에 몰래 올라가서 <고종황제>가 직접 참관하는 <미스 대한제국> 대회 때 영예의 금상을 받았다고 한다.
주막집 주인 할머니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얼굴도 쭈글쭈글하고 별 볼일이 없었지만, 젊었을 때는 동네에서 <황진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황진이>는 시도 잘 쓰고, 노래도 잘 하는데, 어떻게 시도 못쓰고, 창도 잘 못하는 할머니가 <황진이>가 될 수 있느냐라는 국민청원이 당시 경무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와서 사람들이 클릭 참가한 인원이 전국에서 4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 당국의 권고와 세계보건기구(WHO)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의 국제보건차원에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할머니는 부득이 자신의 애칭을, <장희빈>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랬더니 <황진이> 때보다, <장희빈> 시대가 훨씬 더 매상도 오르고, 주막을 찾는 외지 손님들도 할머니의 고상한 이미지와 <장희빈>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서 깊은 감흥을 받았다.
할머니는 나중에는 영화 <타이타닉>의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처럼 젊은 시절에 한양에 있는 멋있는 청년과 <애절한 사랑>을 했다는 전설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영화 장면처럼 배 앞머리에서 뒤에는 남자가 팔을 벌리고 있고, 할머니는 깊은 바다를 행복하게 쳐다보는 포즈를 가끔 취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에 할머니를 유심히 살펴본 남자들은, 할머니 현재의 외모로 봐서는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고, 혹시 궁궐에서 뽑는, <주방보조자> 선발대회 때 <빈대떡 분야>에서 당선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만일 손님 중에 이런 <미스 대한제국> 당선 사실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주인 할머니는 그 손님을 사람처럼 보지 않는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그 자리에서는 웃고 넘어갔지만, 그 모욕적인 발언을 취중이라도 한 손님은 그 날 이후에는 그 주막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박합격>이 산수공부를 체계적으로 한 다음부터는 백원짜리 공책에 할아버지가 마신 막걸리병의 갯수, 할아버지께서 드신 빈대떡의 종류, 크기, 개수를 아주 확실하게 써놓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그 주인 할머니 사이의 무역분쟁도 생기지 않았고, 공정거래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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