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83)

 

반한문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 5천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 시켜서 농사짓고 그럭저럭 먹고살았다. 그런데 45살 때 조강지처가 갑자기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아주 부지런하고 남편에게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한학자로서 매우 존경했다. 그러면서 외아들인 반합격도 아주 소중하게 키웠다. 특히 합격은 5대 독자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기스가 나면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하루 일과 중 95%가 외아들 합격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합격은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는 갈 수가 없었다. 어린이 놀이터에 가더라도 아주 안전한 곳에서만 놀아야했다. 그네 같은 절대로 탈 수가 없었다.

 

그네에서 떨어지거나, 그네에 머리를 부딪히면 그 때에는 거의 초상이 난 것과 동일하게 간주될 것이었다. 반한문은 자신의 아들이 부인과 외출할 때에는 사전에 아들의 몸 전체를 검사하고 이상 유무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있으면, 한지에 붓으로 표시를 해놓았다. 그랬다가 합격이 어머니와 같이 외갓집을 다녀온 다음에는 다시 정밀신체검사를 했다. 혹시 멍이 들었는지,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았는지, 머리에 열은 없는지, 옷에 넘어진 흔적으로 흙이 묻었는지를 최소한 30분 동안 검사를 했다.

 

머리카락 부분은 돋보기를 가지고 확대해서 보았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그날은 합격의 어머니는 밤새 잠을 못자고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리고 향후 재발방지책을 남편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삼진아웃(三振 OUT)제를 시행해서, 만일 어머니가 세 번 똑 같은 잘못을 하면, 시집에서 못살고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웃 동네로 혼자 가서 남의 집을 살도록 각서를 받았다.

 

어머니는 한글을 잘 모르는 무학이었으므로, 반한문이 한지에 붓글씨로 그러한 각서 내용을 쓴 다음, 어머니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빨간 고추장을 각서 맨 말미에 찍도록 했다.

 

어머니가 손도장을 잘못 찍어 너무 한지에 번지면, 아버지는 다시 써서 손도장을 새로 받았다. 그런데 고추장으로 손도장을 찍어놓으니까 방안에서 냄새도 나고, 색깔도 마치 무슨 핏빛 같다는 일부 여론이 일자, 아버지는 제도를 개선하여 봉숭화물을 짜서 예쁜 색깔로 찍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삼진아웃제의 시행으로 커다란 효과를 보아서,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를 단 두 번으로 그치고, 세 번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두 번째 각서에 봉숭화물로 손도장을 찍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가 아버지 나이는 50살이었다. 어머니는 너무나 엄격한 남편과 살면서 한번도 기를 펴지 못하다가 돌아가셨다. 너무나 억울한 여인의 한많은 삶이었다. 합격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쯤 되던 해에 아버지는 성냥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55살 먹은 여사장과 연애를 했다.

 

그 여사장 정줄래(55세, 가명)는 자신의 남편이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성냥공장을 했다. 정줄래는 원래 인물이 좋았다. 나이 스물다섯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지역에서 예선 통과하고 본선에서 탈락했다.

 

그때 충격을 너무 받아 자살하려고 했지만, 어떤 신학생이 집중적으로 인도를 해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유명 가수가 꿈이었던 줄래는 서울로 올라와서 다방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노래 연습을 했다.

 

큰소리로 노래를 연습할 공간이 적어서 줄래는 지하방에서 커다란 장독항아리를 사다놓고 그 속에 머리를 쳐박고 목이 터지라 고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줄래의 음량이 너무 크고 좋아서 줄래가 연습하던 장독항아리 5개가 고음으로 파열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장독 깨지는 소리가 마치 북한에서 핵미사일 발사할 때 나는 굉음 같아서 마을 주민 전체가 대피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줄래가 주로 연습한 곡들은, ‘배신의 무덤’ ‘눈물의 강’ ‘죽을 때 같이 죽으리’ ‘이별의 복수’ 등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결핵판정을 받았다. 나이 많은 의사선생님의 극진한 치료로 줄래는 결핵완치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결핵이 완치가 되자, 그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선생님은 줄래에게 어드바이스를 했다. “앞으로는 노래를 해도 좋은 내용의 노래를 해요. 매일 이별이나 죽음이나, 불행이나 눈물 등을 노래하고 있으면, 노래 가사대로 부르는 사람이 이별을 하고 죽고, 불행해진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요. 지금까지 우울한 가사만 부르고 50살 넘긴 가수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줄래는 크게 깨달았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어둡고 우울한 노래를 부른 유명 가수는 모두 50살이 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 어두운 노래를 부르고도 51살을 넘긴 가수는 유명하지도 않았고, 유명하게 떴다고 해봤자 방송국에서 PD들과 짜고 엉터리도 띄워준 가수라는 소문이 났었고, 나중에는 그게 사실로 밝혀진 것이었다. 그래서 줄래는 자신이 가수가 되어도 절대로 어둡고 이별이나 죽음을 뜻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노트에 열 번 써놓았다. 제목은 서약서로 했다.

 

줄래는 자신이 결핵에 걸린 것도 어두운 노래를 18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5개월 동안은 동요만 불렀다. 그것도 아주 밝고 경쾌한 동요만 골라서 불렀다. 가사 내용을 확인하고 밝은 노래만 불렀다.

 

그때 주로 부른 노래는, <딩동댕 유치원> <산토끼> <설날> 등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둡거나 슬퍼서 눈물이 나올 동요는 가사집을 그 즉시 찢어버렸다. 그때 찢어버린 동요는, <섬집 아기> <엄마야 누나야> <오빠생각> 등이었다.

 

이런 식으로 의사 선생님 말을 잘 들었더니, 폐도 튼튼해지고, 모든 일이 잘 풀렸다. 폐가 너무 튼튼해져서 108계단도 단숨에 뛰어올라갈 수 있었다. 남자와 연애를 해도 세시간씩 아무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폐활량이 되었다.

 

줄래가 다시 다방으로 복귀했을 때에도 줄래가 출근하면 아침부터 손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줄래를 찾았다. 만일 줄래가 밖으로 배달 나가면 줄래를 보러왔던 손님들은 기분 나쁘다면서 다방 앞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어떤 손님들은 줄래가 다방에 돌아올 때까지 엽차만 시켜놓고 3시간씩 커피는 시키지 않고 계속 앉아서 신문만 읽고 있었다. 신문을 너무 바스락거리니까 다른 테이블에서 중요한 국회의원 선거전략을 짤 수가 없어서 파출소에 신고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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