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역에서

오래 된 향나무를 둘러싼 것은
풀과 벌레가 아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무표정한 행인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바퀴들 뿐

낮아지길 원치 않아도
반드시 내려가야 오를 수 있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작은 나무들
그들에게는 아픔도 슬픔도 없는 걸까
바닦에는 늦은 가을날의
낙엽 하나 보이지 않는다

흔들리는 공간에서도
너의 동행을 느낀다
지금 같이 가고 있는 거야
혼자가 아냐
차창 밖에 버려진 거야
우리를 붙잡을 수 없어
너무 빠르게 질주하니까

무엇을 바꾼다는 건
언제나 작은 설레임과 두려움이다
2호선에서 8호선이야
3이 아니고 8인 것은
암사동을 원하기 때문이지

환승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냐
똑 같은 너를 다시 찾는 거야
백 넘버가 달라졌다고
네가 아닌 건 아니잖아

정신 없이 달리다가
캄캄한 공간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갑자기 정지하니까 이상하다
종점이니까 나가라는 거야
내쫓기듯이 밖으로 나왔어
암사 벌판의 공기는 맑았어
이제야 강한 쇠사슬에서 벗어난 거야

초원에서의 밤은
모든 움직임을 거부한다
잠시 약육강식의 게임은 중단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거야
어두워지면 더 시끄러워지는 거야

불을 피우고
동물의 시체를 놓고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거야
술에 취해 낯선 사랑을 껴안기도 하고
대상 없는 울분을 떠뜨리기도 해
비정상적인 동물들이
초원에서 너무 멀리 뛰쳐 나온 거야
그래서 너와 나는
조용한 찻집에서 머물고 있는 거야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이라고 해
참을 수 없는 것을 아픔이라고 해
너는 그냥 웃었어
나도 따라서 웃었어
의미는 없었을 거야
아무런 의미도 보이지 않았어

가을이 깊어가고 있어
서울의 밤은 온통 들떠 있네
단풍 때문이야
낙엽 때문이야
그리고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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