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0)
어느 날 일일주식회사의 정 사장과 임원 3명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은영도 출장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비서가 외국에 업무차 출장을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사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은영은 영어도 못하고, 일본말도 전혀 못했다.
그런데도 일본에 사장 일행과 같이 출장을 간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영 입장에서 안 가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비서직에서 일반 직원으로 부서를 옮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은영의 남자 친구 순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왜 따라 가느냐고 펄펄 뛰었다.
“네가 가서 할 일도 없잖아? 여비서가 일본까지 따라가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혹시 사장이 해외에서 데리고 놀려는 건 아닐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어쩌겠어. 회사에서 내가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출장을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응. 알았어. 따라 가더라도 꼭 필요한 비즈니스만 하고,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 같은 곳에는 가지 마.”
“물론이지. 내가 여직원이지, 남자들 놀이개는 아니잖아.”
은영은 3박 4일 일정으로 동경으로 출장을 갔다. 처음 가보는 동경은 역시 동경이었다. 특히 신주꾸와 아카사까 동네는 볼 것도 많고, 일본 식당에서 마시는 사케는 너무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래서 은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하루 스케줄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장소에서는 사케를 많이 마셨다. 심지어는 호텔 방으로 사케를 사가지고 와서 혼자서도 마셨다.
대체로 일본에서 은영이 하는 일은 그냥 사장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특별히 차심부름을 할 일도 없었다. 주로 호텔 비즈니스룸에서 회의를 하고, 거래 업체 회사를 방문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동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특별히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옷도 매일 갈아입을 것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화장도 제대로 하고, 옷도 좋은 것을 가지고 젊은 여성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게 다 회사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은영은 이 대목에서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글쎄 한 번 보고 말 일본 거래처 사람들에게 비서인 내가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을텐 데...’
출장 마지막 날 저녁 9시 경, 정 사장은 갑자기 은영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어떤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달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 사장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계속 피웠다. 나이는 58살이었다. 돈이 많아 서울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부인도 미인이라고 들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집안이었다.
은영은 사장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도 사장이 혼자 있는 호텔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을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인 자신을 호텔방으로 오라고 하고,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은영은 사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 사장은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 사장은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보다는 열등한 인간이라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낮추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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