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90)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학의 가을은 풍성하면서도 심오했다. 벤치에 앉아 있어도 깊은 사색에 빠져야했다. 교정에서의 삶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장서에 꽃혀있는 책들의 무게에 비례해서 삶은 바다 속으로, 심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미경은 최고경영자과정수업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다가 오늘 같은 날에는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서운했다. 그래서 혼자 벤치에 앉아 빨간 단풍잎과 진누런 은행잎을 보고 있었다. 벤치 아래로 떨어진 낙엽을 발로 비볐다. 바스락소리가 난다.
그건 낙엽이 보내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너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무언가에 붙어있잖아?’ 이런 낙엽의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미경에게는 ‘매달려야 할’ 그 무엇이 없었다. 낙엽 때문에 순간적으로 진한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다고 외로워하지 마! 어차피 인생은 혼자인 거야.’ 다시 낙엽의 무리가 외쳤다. 미경은 그런 소리를 애써 외면하려했다. 더 진한 외로움, 더 가득한 울분이 안에서 치밀어올랐다.
낙엽은 학교 앞으로 걸어가서, 호프집으로 갔다. 젊은 학생들로 호프집은 시끄러웠다. 음악도 빠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는데, 가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인생 아무 것도 아냐. 오늘이 중요해.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그리고 그걸 하면 끝나는 거야. 왜 그렇게 심각한 거지. 이 바보야!’
힙합과 랩에서 가수는 미경을 향해 이렇게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경은 중얼거렸다. ‘여기가 한국인 거지? LA가 아닌 거야?’
미경은 혼자 맥주를 마셨다. 갑자기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맥주로 취하려면 배가 나올 것이 걱정되었다. 소주도 시켜 맥주와 섞었다. 안주는 노가리와 땅콩이었다. 미경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생은 상대적인 거라 어린 여대생들 가운데 혼자 앉아 있으니, 미경의 인생은 끝난 것이 아닌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의 음성은 밝고 미소도 예뻤다. 미용실에 와서 자녀 자랑이나 하고 있는 중년의 아주머니들과는 전혀 다르다. 미경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한 시간쯤 혼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있는데, 갑자기 강교수가 호프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미경은 정신이 확 들었다. 강교수는 미경을 보지 못한 채 호프집 가장 안쪽에 있는 칸막이로 들어갔다. 강교수는 남학생 2명과 여학생 1명과 일행이었다. 그 여학생은 호리호리한 키에 무척 지적인 얼굴이었다. 미경은 강교수를 보자 당황했다.
‘지금 밖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나중에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지만, 술에 취해 재빨리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술을 더 마셨다. 술을 마시면 변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많은 사건과 사고가 벌어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음주운전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고 징역까지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머릿속으로 ‘정언명령’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잠깐 운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금 이 시간 내가 가는 곳까지 단속반이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콘트롤이 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미경은 전에 미용실 손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여자 손님은 어느 날 술에 취해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탈 때는 정신이 들어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운전하시는 택시를 확인하고 탄 것 같았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잠이 깨어서, “아저씨, 지금 제가 어디 가는 거지요?”라고 큰소리로 물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기사분은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깜짝이야. 아가씨는 언제 뒤에 탄 거요?” 그 아가씨에 그 할아버지 이야기다.
그래서 때로는 남자와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같이 모텔에 가고, 그곳에서 서로가 무엇을 했는지도 불분명한데, 나중에 술에서 깨어난 여자가 ‘분명히 네가 술에 취한 나를 건드렸고 했을 거야!’라고 주장하면, 남자는 억울하지만 준강간죄로 징역을 가기도 한다. 서로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여자로부터는 ‘성교에 대한 동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경이 혼자 술에 취해 테이블에서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데, 갑자기 강교수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강교수는 대학생 일행들과 간단히 이야기를 한 다음 술값을 내주고 집에 가려고 하다가 혼자 있는 미경을 발견했다.
그래서 조용히 그 앞에 앉아 미경이 술에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경이 잠에서 깨자 강교수는 미경을 데리고 부근에 있는 다른 레스토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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