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주변에는 붉은 철쭉꽃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오전 11시경 나는 고창읍성을 돌아보고 있었다. 성 안에는 소나무가 많았다. 소나무에서 향긋한 향내가 났다. 봄을 맞아 성은 한껏 푸근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 성을 쌓기 위해 흘렸던 민초들의 피와 땀을 생각해 보니, 인간의 역사란 정말 비극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고창읍성은 나주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방어에 매우 중요한 성으로서,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쌓았으며, 조선 초기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성의 둘레는 1,684미터, 높이는 4~6미터다. 92세에 황욱이라는 사람이 쓴 현판글씨를 보면서,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글씨를 썼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인돌도 보고, 대나무숲도 보았다. 고창군은 의와 예의 고장이라고 한다.

 

고창읍성 안의 규모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적의 외침이 있을 때 그 안에 들어와 대치를 하고 있었다는데,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외곽을 보초서던 병사들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음식은 어떻게 했을까? 등등.

 

성(城)은 규모와 상관 없이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다. 의도적으로 높은 벽을 쌓고,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차단한다. 그럼으로써 독립성을 추구한다. 잘 살던 못 살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독자적인 영역 안에서 내적으로 정신적인 독립성을 선언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게 성이다. 우리의 삶이 그런 성을 만들어 놓고 일생을 살아나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의 성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잘 모를 것이다. 성 안에 있는 내가 성의 모습을 인식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밖에서 본 나의 성! 그건 내가 성 밖으로 뛰쳐나가야 보일 것이다. 고창읍성을 돌면서, 나는 성과 인생에 관해 진지한 의문들 던져보았다.  

 

성을 둘러본 후 관광버스는 가까운 곳에 있는 황토집이라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간단히 점심식사를 했다. 단체관광이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어서 몹시 어색하다. 가급적 말들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만 한다.

 

어서 청보리밭 학원농장에 갔다. 고창읍성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로 가는 거리다. 학원농장은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에 있는데 20만평이나 된다.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시원하게 자라고 있는 보리를 보았다.

 

봄날에 파란 보리밭을 보니 정말 눈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1시간 반 정도를 걸었다. 저수지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조용한 시골길을 걷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보리축제기간이었다. 전통의식에 따라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실제로 하는 결혼식이라고 하였다.

 

세번째 코스는 선운사이었다. 선운사는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우는 선운산(336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577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선운사를 보고 내려오면서 마신 막걸리는 정말 시원했다.  전에 들른 적이 있다. 선운사는 주변 산에 쌓여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병품에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운사까지 가는 길은 아주 운치가 있다. 왼편으로 작은 개천이 있다. 그 건너편에 낮으막한 야산이 있고, 산에는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동백꽃이 많이 있고, 선운사의 오후는 삶의 애환을 훌훌 벗어던지라는 메시지와 함께 침묵하고 있었다.

 

테마관광을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피곤하기는 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출발한 것은 아침 7시였다. 해가 길어져서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8시 반이 넘었다. 토요일 하루를 이렇게 보내니 참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고창까지 내려갔다 올라오고, 세 군데나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하루 종일 우리를 위해 애써준 기사 아저씨와 가이드분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처럼 하는 관광이지만, 그분들은 직업으로 새벽부터 별로 재미없는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 얼마나 힘이 들까? 그들의 덕택으로 편하게 좋은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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