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공작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모두 동화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눈 송이를 보노라면 현실이라는 진흙투성이에서 벗어나 청순한 마음이 된다. 신라호텔 로비에서 바라보는 눈이 내리는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 문득 베르그송의 말이 생각났다. 정신은 천상의 세계를 향한 가벼운 상승의 속성을 지닌다. 반면에 육체는 현실의 중력권으로 향하는 무거운 하강의 속성을 지닌다. 정신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는 땅으로 내려온다는 말이다.

 

이런 두 가지 정 반대되는 정신과 육체를 소유하고 잇는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천상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대립되는 속성을 함께 지닌 모순이다.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번뇌와 갈등은 베르그송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역설에서 비롯되고 있다.

 

요새는 외제차를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고급 호텔에 가면 외제차가 자주 눈에 띈다. 최상류층의 사람들이 특히 많이 이용하는 호텔에 가면 더욱 그렇다. 신라호텔이나 하이야트호텔 같은 곳이 그렇다.

 

BMW를 타고 온 여자 손님이 발레파킹을 하고 호텔 로비로 들어선다. 외제차를 타고 고급 호텔에 오는 여자들의 모습은 대부분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날씬한 몸매에 매력적인 얼굴, 세련된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이때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멋있는 정장을 하고 그 여자 손님을 먼 곳에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무스를 발랐다. 매우 세련되고 교양있게 보였다. 옆에는 영어잡지인 타임(Time)지를 끼고 있었다. 그 청년은 여자 손님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사모님,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미교포 대학생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양수리를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요?”

깨끗한 옷차림에 세련된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언뜻 봐도 그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재미교포같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호텔 종업원에게 물어보세요.”

신라호텔에서 양수리 가는 길을 가르켜 준다는 것은 누구도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겠는가? 애당초 불가능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답변을 한 여자 손님은 그냥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강일은 고급 외제차를 혼자 운전하고 오는 여자 손님들만을 상대로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을 붙여본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끊임 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성공하게 된다.

 

자꾸 해 보면 테크닉도 늘게 된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계속 말을 붙여보는 것이다. 로비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일을 마치고 나오는 여자 손님에게 다시 말을 건다.

 

“아 아까 뵈었던 분이시지요. 이제야 일이 끝나신 모양이군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 사정을 전혀 모릅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차 한잔 대접할게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시간이 없다면서 그냥 간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시간을 허락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다른 일정 때문에 가야할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강일의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는 여자가 있다. 그날 따라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든가, 아니면 갑자기 약속이 펑크가 나서 시간이 있다든가, 아니면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있다든가 할 때다.

 

강일에게 시간을 잠시 내 준 여자는 커피숍에서 편한 대화시간을 갖는다. 강일은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한다.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나 계속 살았다. 아버지가 미국에 이민가서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 몇 천억원의 투자를 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아버지에게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자신은 공작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공작이 백작보다 높은 칭호인데 강일은 그런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은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19세기 영국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에밀 브론테가 쓴 소설 폭풍의 언덕을 원서로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은 사랑의 이야기를 쓴 명작이다. 자신은 그 소설을 현재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 사랑의 스토리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 소설의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날 따라 이상야릇한 심리상태에 있는 여자는 멋있게 생긴 젊은 남자가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있는 사랑의 스토리에 관한 소설을 실감있게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별로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강일은 어느 정도 여자의 반응을 본 다음 자신의 아버지가 고국에 가서 뜻있는 사업을 할 것이 있는지 알아 보라고 해서 왔다. 일차로 100억 원 정도로 시작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경치가 아름다운 양수리라는 곳에 스코틀랜드 스타일로 호텔을 멋있게 지어보고 싶다고 했다. 호텔 이름은 폭풍의 언덕으로 지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사기를 잘 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에게도 상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말에 솔깃한 여자는 마음이 동했다. 강일과 함께 양수리에 가서 경치 좋은 스코틀랜드 풍의 멋있는 호텔을 짓는데 일조를 할 생각으로 안내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강일은 여자에게 자신은 미국에서 벤츠 600을 운전하고 다니지만 한국에 와서는 일부러 차를 운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도로사정이 나쁘고 운전자들이 난폭운전을 해서 도저히 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의 외제차로 강일을 태우고 안내를 한다. 그러면서 강일의 초호화판 생활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환상에 빠진다. 이런 남자를 알아 두면 손해볼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몇 차례 양수리에 가서 드라이브를 하고 환상적인 호텔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을 마시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육체관계를 맺게 된다.

 

강일은 아버지가 사업자금을 일차로 10억 원을 송금했는데 외환관리법 때문에 찾는데 시간이 지연된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돈을 빌려 쓴다. 여자는 며칠 있으면 10억 원을 찾는다는 말에 돈을 빌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사기였다.

 

강일은 이런 사기행위를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날이 갈수록 사기방법은 세련되고 대담해졌다. 많은 여자들이 이런 수법에 사기를 당했다. 한 사람에게서 많은 돈을 뜯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몇 십만 원 내지 몇 백만 원의 사기행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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