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스님을 주례로 모시려면 신랑도 삭발을 해야 한다
강 교수는, ‘사람들의 수준은 이렇게 현저한 차이가 나는구나! 끼리끼리 사는 게 편한데, 수준 차이가 나는 사람과 맞추어 산다는 것은 물과 기름이 섞이는 것처럼 불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정혜는, ‘사람이 배워봤자, 거기서 거기지, 무슨 차이가 난다고 저렇게 교만하고 건방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점점 정이 떨어져 나갔다.
강 교수는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이었지만, 결혼 초기에는 여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은 외계인의 수준이었다. 열심히 일을 하고, 학교에서 인정을 받으면, 자연히 부인도 자신을 인정해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자리를 잡고 더 이상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강 교수는 처갓집에서 그동안 도와준 은혜를 망각하고 뻔뻔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장인이 돈을 번 과정이 정당치 않다고 비난하거나, 죽을 때까지 돈만 벌다가 죽으면 무엇하느냐는 어려운 종교적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부인과 각방을 쓰면서 가급적 늦게 귀가했다. 주로 학교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결혼할 때에는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 아이를 갖자고 약속했으나, 그 후에는 정혜와 같이 공부에 친하지 않은 여자와 아이를 낳으면, ‘백치 아다다’의 소설 속 주인공이 호적에 올라갈 것을 염려해서 의도적으로 피임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혜의 옛 남자 친구 때문에 전쟁을 치뤘다. 그것은 정말 불행한 사건이었다. 결혼하고 꼭 일년이 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1주년 기념행사를 아주 특별하게 거행하기로 했다. 한달 전부터 치밀하게 행사를 준비했다. 행사프로그램은 강 교수가 만들었다. 비용은 정혜가 마련했다. 두 사람은 대형기획사 직원들처럼 행사 준비를 위해 회의도 많이 했다.
결혼식을 올린 날은 12월 12일이었다. 원래 결혼날짜를 잡을 때에는 강 교수의 의견은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 워낙 재력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강 교수측은 결혼에 관해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 돈 한푼 내지 않고 공짜로 결혼식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옛날 노예가 농장에 팔려가는 신세와 비슷했다.
노예는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거래시장에 끌고 가서 그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넘기면 그만이지, 노예가 무슨 날짜를 택일해서 다른 주인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강 교수 부모는 전통적으로 절에 다니고 있었지만, 정혜 부모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강 교수측은 오래 전부터 다니고 있던 절의 주지스님을 주례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어했다.
정혜 어머니가 그렇게 스님을 주례로 모시고 싶다면, 신랑도 스님처럼 삭발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는 과격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꼭 하고 싶으면 신랑 측 참석자 전원이 삭발하고, 회색옷으로 통일해서 와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신부도 삭발을 시키겠다고 했다. 당시 야당 정치인들이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혜 어머니는 강 교수측에 삭발뿐 아니라 결혼식을 하기 전에 최소한 일주일은 단식을 하고 와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 부모는 자신들이 3대째 다니고 있는 절의 주지스님을 주례로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강 교수에게 삭발을 하자고 권유했다. 강 교수는 그때만 해도 젊었기 때문에 삭발을 하고 결혼식장에 나타나면 신랑이 폭력조직의 깍두기로 보일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다.
또한 자신도 국회의원으로 오해받을 것이 아니냐고 했다. 옆에서는 그러면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쓰고 신랑입장하면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랬더니 정혜측에서는 주례를 서는 스님도 가발을 쓰고 올 것이냐고 물었다.
정혜 어머니도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친정 부모를 따라 절에 다녔다. 그런데 남편 사업이 어려워서 부도 직전에 있을 때 동네 사람 따라 교회에 가서 100일 동안 새벽기도를 다녔더니 큰 공사를 따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다. 그 새벽기도 덕분에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고, 다시 사업이 활성화되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이상한 징크스가 생겼다. 전부터 같이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 정혜 어머니에게 간청을 해서 하는 수 없이 절에만 갔다 오면 일주일 이내에 남편 회사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중에 누가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6일 동안 아무런 사건사고가 없어서 이번 주는 잘 지나가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있으면,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 정혜 어머니는 생리통이라도 도져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10번이나 겪은 다음부터는 정혜 어머니는 더 이상 무서워서 절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정혜 어머니와 같은 절에 다니던 한 보살은 종교를 바꾸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서 무슨 변명을 하려고 그러느냐고 걱정을 했지만, 정혜 어머니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은 다음은 그때 가서 문제이고,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생리통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화를 냈다.
결국 정혜 어머니는 절에 가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 다음부터는 더욱 분발해서 금요일 철야기도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새벽기도 때도 교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가서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목사님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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