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가을사랑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꼭 한 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는 없어.-(중략)-첫날 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너무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펴보았다. 몇 군데 구절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효석이 이 단편소설을 쓴 것은 1936년 10월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꼭 70년전의 일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꽤 오래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시간이란 그렇게 상대적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주인공 허 생원은 봉평장이 선 날 밤 개울가로 목욕하러 나간다. 때는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 돌밭에서 옷을 벗어도 좋을 것이었는데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혹시 사람들이 볼까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그 동네 성 서방네 처녀와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성 서방네는 망했고 처녀는 그 후 제천으로 팔려갔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 후 허 생원은 장에서 만나 함께 장사를 하러 다니는 '동이'라는 젊은이에게 자연스럽게 정이 끌리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동이'가 허 생원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스토리다. 

 

메밀꽃 필 무렵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짤막짤막한 구절에 그때 그때의 장면이 영화보듯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이라고할 수 있다. 테마여행을 따라 나도 이효석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효석 기념관도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273번지에서 출생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길리문학과(현재의 영문과에 해당)를 졸업했다. 함북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자리를 옯겨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은 그가 30세때 조광이라는 잡지 10월호에 게재한 것이었다. 이효석은 그후 1942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메밀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하다. 달빛은 흐뭇해 보이고, 달빛과 메밀꽃 때문에 숨이 막혀버렸다. 누구나 첫 번째 일을 잊을 수는 없다. 살면서 그때 그때 다가오는 경이로운 감정, 경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경험과 아픔을 기억하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다. 가을은 자신의 정점에 서 있고, 우리는 곧 다가올 낙엽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가을의 슬픔을 맛보아야 한다. 그런 슬픔의 연못을 건너기 위해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추억들을 꺼내 살펴보아야 한다. 빛바랜 추억들이 달빛을 받아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궁금하다. 가을은 가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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