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re you from? (1)
가을사랑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겨울 날, S 변호사는 먼 외국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두툼한 소포를 받았다. 그 속에는 그가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는 작품 하나와 옛날 한국에서 살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스케치해 놓은 글이 들어있었다. S 변호사는 그 글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나는 S 변호사의 양해를 얻어 두 사람 사이의 추억을 단편소설로 각색해 보기로 했다. 한국판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이 글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1. 추억의 캔버스
사람의 가슴 속에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하얀 캔버스가 있다.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기억의 강이다. 혼자 있을 때 남 몰래 꺼내 보기도 하고, 소중하게 쓰다듬어 보는 그런 존재다. 그 캔버스에는 맨 처음 각인된 사랑이 강하게 채색되어 지워지지 않고 있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서툴지만 선명한 색깔로 채색된 그 모습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어설프지만, 순수했던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똑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진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한국의 겨울과는 다르다. 눈이 내리지도 않고, 그냥 한국의 늦가을 같은 날씨다. 조금 쌀쌀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추워서 떨 정도는 아니다. 그런 날씨와 상관 없이 낮과 밤은 서울과 똑 같이 번갈아 가면서 찾아 온다.
낮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고 저녁노을이 하늘을 예쁘게 수를 놓는다. 점점 어두워지면 초승달이 뜨고 그 옆에는 venus가 초롱초롱한 모습으로 사랑을 상징하게 된다. 이제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한낮의 피로가 가시고, 밤에는 또 다른 생기가 샘솟는다.
‘조금 전에 산에 갔다 왔어요. 요즈음은 오후 늦게 자주 가게 되네요. 산 위에서 보는 석양의 저녁 노을이 멋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반쯤 어두어진 하늘에는 초승달과 그 옆의 샛별이 쌀쌀한 날씨와 더불어 겨울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어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애련은 옛날 일을 떠올리기 위해 와인을 마셨다. 빈 속에 짜릿함이 느껴졌다. 캘리포니아 화이트와인은 아주 유명하다. 그 넓은 포도밭에서 매년 생산되는 wine은 다 어디로 들어가는 것일까? 사람들을 향기롭게 하기도 하고, 추억을 꺼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도 한다. 그게 wine이다. 사랑을 고백하게도 만든다. wine의 은은한 색깔처럼 옛사랑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밤에는 꿈을 꾸었어요. 옛날 그 모습인데요, 내가 다니던 은행은 아닌 것 같은 데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어느 직장에 새로 입사했어요. 두 사람은 서로 알아보고는 아는 척해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해야 할까, 망설이는 것 같았어요. 그 다음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요. 꿈에서는 뚜렷했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거예요. 짧은 꿈이었지만 동진 씨를 꿈에서라도 보게 되어 너무나 반가웠어요. 동진 씨는 무늬 있는 짧은 소매 남방을 입고 있었어요.’
누구나 살면서 꿈을 꾸게 된다. 평소 느끼던 생각과 감정이 꿈에서 나타난다. 꿈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도 꿈 속에서는 마치 또렷한 현실처럼 이루어지고, 그것은 현실 이상으로 명확하게 다가 온다. 그런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정말 깨어나기 싫다. 깨어나서도 한 동안 멍하니 꿈의 감미로움을 껴안고 있게 된다.
‘아마 내가 오늘 처음 만난 이야기를 떠올리려고 지난 밤 꿈을 꾸었나 봐요. 지나간 이야기를 떠올리려니 가슴이 벅차고 아려와요. 옛날 이야기가 잘 써질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번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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