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사랑
성탄절 아침이다. 도시에서는 성탄절 아침에 교회의 새벽종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문득 그리워진다.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서 희망이 펼쳐지는 꿈을 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마찬가지다. 동네에 조그맣게 꾸며놓은 트리가 웬지 정감이 가고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서울 시청 앞에 설치된 대형 트리는 현란하기만 하고 정신이 없게 만들지,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급 호텔과 유명 백화점 앞에서 번쩍이는 트리 앞에서는 상업성만 보일 뿐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에는 서울구치소에 갔다. 1998년 9월부터 그곳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벌써 10년이 되었다. 세월이 빠름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10년이나 지났는데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 가면 세월이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질식시켜 놓아 정적이 흐르는 곳이다. 삶의 맥을 끊어놓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 시간을 멈추게 해놓은 곳이다. 사람들은 대개 무표정하다. 담 하나 사이로 그렇게 달랐다.
접견은 4시부터 시작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징역 4년 6월의 형을 받아 상고를 해놓은 A 씨를 만났다. 그는 국선변호인을 선임해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구속된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상고이유서를 50쪽이나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재판부에 탄원서도 써서 보냈다. 면회 오는 친척도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재판을 남겨놓고 불안감과 초조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
B씨 역시 외국에 이민 가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출국금지가 된 상태에서 구속되었다. B씨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면회를 와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벌써 두달이 되었다. 처음에는 구속되어 어수선하게 지내느라고 그런 대로 넘어갔는데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3.05평 좁은 방에서 7명이 함께 지내고 있다. 화장실을 포함한 공간이어서 무척 비좁다.
잠을 잘 때도 옆 사람과 끼어서 자야 한다. 아직은 젊어서 매일 팔굽혀펴기도 천 번씩이나 하고 운동시간에는 30분간 열심히 뛰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 몸은 어떤 의미에서는 편하다. 방도 따뜻하고, 화장실에 온수도 나와 샤워도 할 수 있고, TV도 시청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슴이 타오르는듯한 답답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자고 어쩌지 못한다. 특히 토요일, 일요일 같은 주말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공휴일에는 방에서 밖에 일체 나가지 못해서 더욱 견딜 수 없다. 꼼짝 못하고 7명이 좁은 방에서 보내야 하는 것은 지옥이다. 바깥에서는 그렇게 기다려지는 주말과 공휴일인데 이곳에서는 정반대였다. 그때가 꼼짝 못하고 갇혀서 지내는 최악의 시간이다.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래서 많이 싸우게 된다. B씨가 있는 방은 경제방이고, 항소방이라 덜 한데 다른 방에서는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B씨도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다가 법정구속이 되었는데, 요새 법원에서는 법구(법정구속)를 많이 시킨다.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하고 나서 판결을 선고할 때 사안이 무겁다고 판단되면 그날 곧 바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수감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법원의 형량이 많이 높아졌다. 재산범죄에 있어서는 피해자와 완전합의가 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잘 하지 않는다. 적당한 금액을 공탁해서는 어림도 없다.
B씨는 무척 기가 죽어 있었다. 구속이라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징역 1년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었다. 1시간 넘게 두 사람의 하소연을 들었다.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5시가 넘어 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감기가 들어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의왕에서 과천을 지나 서초동으로 들어오는 터널을 탔다. 터널 안은 또 폐쇄된 작은 공간이었다. 답답함은 그곳에도 있었다.
연말이라 거리는 수많은 차량으로 붐비고 있었다. 라이트를 켠 차들도 모두 무표정했다. 구치소에서의 표정 없는 유기체와 거리에서의 표정 없는 무기체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분명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담겨 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움직이는 것이고, 정차해 있어도 움직이는 것이다.
모두들 파도에 휩쓸려 왔다 갔다 하듯이 표류하고 있었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그 �향을 알 수 없었다. 문득 내 영혼의 나침반을 꺼내 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동쪽 방향을 찾고 싶었다. 에덴의 동산은 분명 동쪽에 있을 것 같았다. 동쪽 방향도 역시 캄캄했다. 동이 트고 해가 뜰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를 달래기 위해 호프를 마셨다. 그곳은 아직 서쪽이었다. 에덴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호프 두잔에 벌써 취기가 돈다. 술기운으로 바라 본 서울의 거리에는 똑똑한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이 뒤섞여 밤을 보내고 있었다. 연약한 몸으로 교만함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채, 이를 악물고 살아가고 있었다.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많이 가진 사람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똑 같은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보였다. 어떤 만남은 의미 있어 보이고, 어떤 만남은 무의미해 보였다. 이별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 보였다. 아직은 한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하늘에는 아주 커다란 둥근 달이 떠 있었다. 나는 그 달을 보면서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2천년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 인간을 원죄에서 구하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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