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제1장 (2)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 1:3~4)’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함에 있어서 제1장 모두에서 인사말을 적고 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개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에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관해 체계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이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지 않고 오셨다면 인간은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육신의 형태로 이땅에 오시도록 한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계보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제1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모두 42대에 이른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그 출생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인간인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들어가 잉태시켰고, 그후 출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 성령잉태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의 과학이나 의학적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몰라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다. 그랬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그 생령을 다시 찾아가시면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고 생명을 잃게 된다.

 

이런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 잉태를 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결함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성적 교섭에 의해 태어났다고 해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교섭을 허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급속도로 성적인 문란상태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간음의 죄를 끊임없이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율법인 간음하지 말라는 규범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성결의 영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엿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원래 의심이 많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지식 범위 안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전했을 때 도마는 의심이 많아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태 그대로 부활하신 것이었을까? 다시 말하면 손에 못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구멍이 그대로 남아있었을까? 그렇다면 온 몸과 얼굴에 채찍으로 맞아 생긴 상처며, 피를 흘려 피가 거의 빠진 상태에서 다시 그대로 부활하신 것일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도마는 매우 인간적인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시면 자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는 것이었다.

 

도마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후 8일이 지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도마도 함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은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제기했던 말들을 어떻게 들으셨던 것일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시 만났을 때 도마가 의심했다는 사실을 전해 드렸던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의 위와 같은 말씀을 듣고 도마는 대답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0)

 

분명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았으므로 굳이 손이나 옆구리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적인 현상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성경은 이에 말한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고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쉽게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래도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였다. 우리는 직접 제자가 될 기회도 없었다. 하물려 도마도 그런 의심을 했는데 우리인들 어찌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그래서 방황하고 믿음도 가지지 못하고 이땅에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곳에 절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는 2천여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와 부활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는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요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도마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은혜와 긍휼을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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