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전으로 옮기다
증조부는 근면성실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들였다. 그분이 우리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 증조부 재산을 모두 없앴다. 그래서 아버님은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 고향은 경주 김씨 상촌공파 후손들이 오래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우리 잡안도 아주 오래 전부터 고향에서 살았다. 나는 고향에서 태어나 4살까지 살았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다. 고향 친구도 없다. 내가 태어나 살던 집은 없어져 버렸다. 조상들의 산소만 남아있다.
4살 되던 해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님은 제재소를 시작하셨다. 이름이 한일제재소였다. 인동 굴다리 지난 철로변에 집이 있었다. 옆집에 소를 잡는 곳이 있었다.
집에서 나가 바로 앞 경사진 곳을 올라가면 철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기차는 매우 커보였다. 신기하기도 했다. 철로에 귀를 댄다.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오면 얼른 일어나 도망간다. 못을 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다음 못 머리 부분이 납작하게 펴진 것을 보기도 했다. 기차의 위력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기차와 철로를 벗 삼아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기차를 타면 옛날 생각이 난다. 옆집에 고등학교 동창 김영석이 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후에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둘이서 한 동네에 살았던 것이다. 영석 어머니는 영석에게 나보다는 더 공부도 잘 하고, 잘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자식을 키우면서 라이벌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는 우리 집이 영석네보다 잘 살았다.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학교에 다녔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함자는 병(秉)자 구(九)자시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할아버지 사진도 없어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마음이 좋아 친구들 술 사주고 놀다가 증조할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재산을 전부 없앴다. 그 산골에서 포천읍까지 다니면서 술을 많이 드셨다.
할머니는 청송 심씨다. 할머니 이름은 호적에도 그냥 심씨라고만 되어 있다. 매우 선한 모습인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 지을 땅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평양과 만주, 서울 등으로 돌아다니시면서 공사현장 등에서 일을 하였다.
신흥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 인동 사거리에 있는 한일제재소로 이사를 갔다. 제재소 안에 집이 있었다. 어렸을 때 주로 제재소 마당에서 놀았다. 나무를 쌓아놓은 곳을 올라 다니며 놀이를 했다.
톱밥이 많아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다. 집에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먹을 것이 많이 있었다. 사과와 배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집안이 넉넉하게 살아서 그런지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았다. 가끔 어머니가 수박을 사들고 학교에 오셨다. 학교 신발장을 집에서 짜서 보내기도 했다.
대전신흥초등학교는 1924년 4월 1일 개교했다. 교훈은 ‘슬기롭게 성실하게 건강하게’다.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초등길 21(신흥동 150-3)에 위치한다
3학년때 신흥초등학교에서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문창동에 있는 신흥주택에 살았다. 새로 지은 주택단지였다. 몇 십채가 모여 있는 단지였다. 그 당시에 대전에도 주택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하나의 커다란 단지를 조성해서 거의 비슷한 규모와 형태로 주택을 지어 매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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