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전문창초등학교를 다니다
바로 옆집에 장원규가 살았다. 원규 아버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한 동네 친구니까 거의 매일 붙어서 지냈다. 원규는 나중에 대전에서 학원 강사로 근무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원규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어릴 때 코흘리개가 검사가 되어 인사를 드리니 무척 기뻐하셨다. 1992년이었는데 그때까지 원규 가족은 계속해서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릴 때는 형제가 많아 재미있게 놀았다. 동네 친구들도 많았다. 소꼽장난도 하고, 연탄재를 부숴 서로 던져서 맞히는 위험한 전쟁놀이도 했다.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썰매놀이도 많이 했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나돌아 다녔다. 동네 형들과 함께 아이스케키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 녹기 직전의 아이스케키를 하나 주면 받아먹었다. 아이스케키는 1원씩 했다.
4학년 때 학구제 변경에 따라 문창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집 근처에 있는 가까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나중에 대전에서 근무를 하면서 문창초등학교를 가보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넓어보였던 학교가 참 작아보였다.
아버님은 공설운동장 입구에 있는 제재소를 운영하셨다. 제재소 이름은 한일제재소였다. 제재소 바로 앞에 개천이 있었다. 집에는 제재소에서 사용하는 트럭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제재소를 할 정도면 잘 사는 수준이었다. 여름에 수박을 많이 먹었다. 수박을 사다가 대야에 물을 떠놓고 그 안에 담갔다 먹으면 시원했다.
문창동 살 때 건넛집에 매형이 살고 있었다. 고향이 청양인데, 삼촌집에서 대전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누님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 사업이 어려워졌다. 시청 뒤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문창동 집을 팔고 시청 뒤에 있는 집을 전세로 얻어 그곳에서 하숙을 했다. 학생과 군인 몇 사람이 있었고, 어머니가 밥을 해주었다. 우리는 좁은 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생활해야 했다.
우리 집은 보안부대와 담을 같이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담에 올라가 구경했다. 집 옆에 공터가 100평 정도 있었다. 그곳에 채소를 심었다. 그래서 상추와 배추, 무를 많이 먹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님을 도와 삽질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그곳도 꽤 넓어보였다.
대흥동 살 때 부근에서 살았던 장락성 사장님을 나중에 서울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전에서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어려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몰랐지만, 그래도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는 말에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자주 만나 가깝게 지냈다.
장 사장님은 학교 다닐 때 기계체조를 했고, 아주 호탕한 성격이었다. 영동호텔 옆 사무실에 자주 들러 커피를 마셨다. 송탄부대찌개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전 이야기를 했다. 장 사장님은 70이 넘은 연세에도 뚜껑이 열리는 벤츠를 운전하고 다녔다. 어린 아들과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18번 노래는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이 손을 잡고’였다.
대흥동으로 이사 와서도 계속해서 문창초등학교를 다녔다. 5학년과 6학년을 그렇게 다녔다. 매일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지금도 학교를 걸어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어머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해서 사주지 않으면 고집을 부렸다. 아침을 먹지 않고, 도시락도 놓고 가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면 어머님이 속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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