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토끼와 닭을 키우다

 

 

 

나중에 커서 나는 두고두고 그날 밤 상황이 떠올려졌다. 부모님께서 그 때 다른 결정을 하셨더라면 내 운명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아찔하기만 한 장면이었다.

 

하숙을 치루는 것이 잘 되지 않자 대흥동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옆에 교회가 있었고, 바로 옆집에는 친구 양태호가 살고 있었다. 집을 옮기고 나서는 더 이상 하숙을 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여전히 집에서 놀고 계셨다. 집에서 닭과 토끼를 키웠다. 토끼풀과 칡잎을 뜯어오는 일은 할머니와 어린 우리들 몫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반장이었던 육일섭 군의 모나미 잉크 병 뚜껑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전 학생이 야단 맞고 뚜껑을 찾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잉크 병 자체도 아니고 단지 병뚜껑을 잃어버렸다고 누가 훔쳐간 것으로 생각하고 도둑을 찾는 것처럼 난리를 쳤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일이 많았다. 토끼와 닭 숫자가 늘어나서 형과 나는 할머니와 거의 매일 충남대학교 캠퍼스나 대사동 뒷산에 가서 먹이를 마련해 와야 했다. 당시에는 충남대학교 캠퍼스가 문화동에 있었다. 밀가루 푸대를 하나씩 가지고 가서 토끼풀을 가득 담아 꽉꽉 눌러 등에 메고 왔다.

 

토끼풀을 뜯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등에 메고 먼 길을 오는 건 정말 힘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골아 떨어져 그냥 잠이 들었다. 숙제나 겨우 할 정도였고 다른 공부는 할 시간이 없었다.

 

학교 성적은 중간에서 맴돌았다. 성적도 보통이고 집안은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학교에 가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평범한 상태에서 중학교 생활을 보내고 다시 대전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과외도 전혀 못하고 어떻게 대전고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토끼풀을 허리에 짊어지고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풀을 뜯으러 다니던 심정이 어땠을까?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포천 선산에 가서 장례를 치루던 일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아들이 세 명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큰 아들이었다. 할머니는 말년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유천동까지 놀러가서 철교를 건넜다. 철교를 다 건너고 얼마 안 있자 반대편에서 기차가 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철교를 건너던 중 기차가 왔으면 우리는 모두 끝났을 상황이었다.

 

1968년 3월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대전고등학교는 대전광역시 대흥동에 있다. 1917년 4월 1일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실로 설치되었다. 그 후 1918년 4월 1일 관립 대전중학교로 설치되었고, 1921년 4월 1일 도립으로 이관되면서 명칭이 대전공립중학교로 바뀌었다.

 

나는 집안이 어려워 학교만 다니고 있었다. 다른 활동은 할 형편이 못되었다. 교복을 바꾸어 입는 것도 어려웠다. 못된 친구들이 교복에 잉크를 뿌려 놓으면 그것은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대로 입고 다녀야 했다.

 

잉크 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있으면 신경이 계속 쓰였다. 돈이 있으면 즉시 교복을 바꾸었을텐데. 그것은 가난하고 힘 없는 설움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들은 정말 나쁜 아이들이었다. 남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것을 즐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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