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재수생활을 하다
대학교 입학시험에서 낙방한 나는 대전에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무런 대책없이 망망대해에 혼자 떠있는 느낌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님, 나이 어린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만날 친구도 없었다. 대부분 바쁜 신입생이었고, 떨어진 친구들은 대입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학원을 알아 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막연한 상태에서 대학시험에 떨어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억울하게 느끼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방향이나 계획은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에서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거나 방향을 잡아 줄 사람도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할뿐 어떻게 하라는 말씀도 없으셨다. 사실 부모님들은 어느 정도 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잘 모르셨다.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하도록 맡겨 놓고 계셨다. 대학시험에 떨어지고 집에서 놀고 있을 무렵 대사동 대신초등학교 입구에 있던 우리 집에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40평 남짓한 땅에 3층 건물을 짓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 건물을 짓게 되었는지, 건축자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 자금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1층에 작은 점포 2개, 2층에 주택 2채, 3층에 방 2개를 만들었다. 가운데 계단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집 짓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러 다녔다. 시내 가서 마차에 싣고 왔다. 큰 길에서 집까지는 경사진 길이어서 마차를 밀어야 올라올 수 있었다. 창문 같은 것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당시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하루 종일 집 짓는 현장에서 인부들과 있다가 일이 끝나면 지쳐서 잠이 들었다. 대학교 시험에 떨어진 나로서는 그냥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가끔 책을 보기는 했지만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고, 생활은 나태해졌다.
3월부터 7월까지 정말 한심한 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서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여부도 불분명했다. 자신도 없어졌다. 누가 옆에서 공부하도록 채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학생 신분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노는 신세였다.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는 형이 한심하다는 식으로 걱정을 했다.
형은 서울에 가서 혼자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고등학교 1년 선배로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2학년이었다. 어려운 생활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형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휴대용 전축을 하나 사가지고 방학 때 내려왔다.
우리는 대신초등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돗자리를 펴고 누워 아름다운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노래를 즐겨 들었다. 주로 패티김과 남진, 나훈아 노래를 많이 들었다. 이승재의 눈동자도 많이 들었다. 이승재는 1970년 눈동자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눈동자는 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이다.
<그 날밤 이슬이 맺힌 눈동자 그 눈동자/ 가슴에 내 가슴에 남아 외롭게 외롭게 울려만 주네/ 안개 안개 자욱한 그 날 밤거리/ 다시 돌아올 날 기약없는 이별에 뜨거운 이슬 맺혔나/ 고독이 밀리는 밤이 오면 가슴 속에 떠오르는 눈동자/ 그리운 눈동자 아아~ 그리운 눈동자여>
2017년 7월 11일 대전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있어 내려갔다. 서울에서 차를 운전하고 갔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조정에 참여했다. 원고 본인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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