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7)

 

미경은 언젠가 사주역학을 잘 보는 사람에게 찾아갔다. 가까운 여자 친구와 둘이서 사주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용하다는 역학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전생에 남의 첩으로 살았어. 그때 자네 때문에 본처가 제명에 못 죽었어.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이 다 놈팽이고, 건달이었을 거야. 그렇지? 뻔해. 내 눈은 못 속여.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놈들만 나타날 거야.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제명에 못 죽어.”

 

미경은 놀랐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사주와 관상, 과거와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 들어보았지만 지금처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정확하게 진단하고 맞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남자를 만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해요?”

 

역학자는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을 따져보는 듯 했다. 미경의 일행을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30분 정도 역학자는 방안에서 혼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딸랑거리는 소리도 나고, 무언가 부르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다음 미경을 들어오라고 했다.

 

금년 가을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자네하고 잘 맞아. 그 사람을 놓치면 안 돼. 잘 잡아. 그 사람은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한 남자야.”

 

미경은 이 말이 뇌리 속에 박혔다. ‘금년 가을. 많이 배운 남자!’ 무언가 운명의 기적소리가 들리고, 백마 탄 왕자가 몸을 단정하게 한 공주를 찾아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학의 가을은 풍성하면서도 심오했다. 벤치에 앉아 있어도 깊은 사색에 빠져야했다. 교정에서의 삶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도서관 장서에 꽂혀있는 책들의 무게에 비례해서 삶은 바다 속으로, 심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미경은 최고경영자과정수업을 마치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서운했다. 그래서 혼자 벤치에 앉아 빨간 단풍잎과 진누런 은행잎을 보고 있었다. 벤치 아래로 떨어진 낙엽을 발로 비볐다. 바스락 소리가 난다.

 

그건 낙엽이 보내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너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무언가에 붙어있잖아?’ 낙엽의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미경에게는 매달려야 할그 무엇이 없었다. 낙엽 때문에 순간적으로 진한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다고 외로워하지 마! 어차피 인생은 혼자인 거야.’ 다시 낙엽의 무리가 외쳤다. 미경은 그런 소리를 애써 외면하려했다. 더 진한 외로움, 더 가득한 울분이 안에서 치밀어 올랐다.

 

미경은 학교 앞 호프집으로 갔다. 시끄러웠다. 음악도 빠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는데, 가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인생 아무 것도 아냐. 오늘이 중요해.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그걸 하면 끝나는 거야. 왜 그렇게 심각한 거지. 이 바보야!’

 

힙합과 랩에서 이렇게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경은 중얼거렸다. ‘여기가 한국인 거지? LA가 아닌 거지?’

 

미경은 맥주를 마셨다. 갑자기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맥주로 취하면 배가 나올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소주도 시켜 맥주와 섞었다. 안주는 노가리와 땅콩이었다.

 

미경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생은 상대적인 거라 어린 여대생들 가운데 혼자 앉아 있으니, 미경의 인생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늙어 눈치가 보였다. 얼굴은 몰라도 심장은 완전히 낡아빠져 사랑도 미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젊은이들의 음성은 밝고 미소는 예쁘다. 미용실에 와서 자녀 자랑이나 하고 있는 중년의 아주머니들과는 전혀 다르다. 미경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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