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2)
“내가 오늘 당신이 자주 만나는 그 아가씨를 만났어요. 무슨 관계냐고 물었더니 아무 관계도 아니래요. 그래서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공연히 당신을 의심해서...”
“아냐 괜찮아. 내가 딴 짓을 하지 않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강 교수는 이미 미경을 만나기 전에 그 아가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강 교수는 전혀 걱정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아는 미경이라는 미용실 원장이 아가씨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막을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강 교수가 책임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강한 메시지를 주고 굳게 약속을 했다.
그 아가씨가 만났던 여자는 강 교수의 부인이 아니고, 단지 잘 아는 미용실 원장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 그 여자는 아무런 권한도 없고, 지금이라도 강 교수가 더 이상 만나주지 않으면 아무 할 말도 없는 사람이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지금은 완전히 늙은 상태라 남녀간의 애정관계는 불가능한 불쌍한 존재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그 아가씨는 강 교수를 믿고 마음을 놓겠다고 하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교수님,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매우 세련되었고 돈도 많아 보였어요. 그리고 교양 있고, 교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교수님이 바람을 피면 마치 교수님을 죽일 것같은 태도였어요. 교수님이 그 아주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제가 물러설게요. 그 아주머니가 불쌍해요.”
결국 강 교수와 그 아가씨는 앞으로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고, 간첩들이 접선하듯이 더욱 주위를 살피고, 아가씨의 핸드폰번호도 바꾸고 아무런 추적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그 아가씨가 크게 놀라서 고통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위로하는 차원에서 현금 100만원을 즉석에서 꺼내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달쯤 지나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강 교수 부인이 바람을 핀 것이었다. 강 교수 부인이 운전하던 차가 접촉사고를 냈다. 상대 차량이 끼어들기를 하다가 사고를 냈는데, 보험회사 직원이 와서 쌍방과실로 처리하면서 강 교수 부인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사건처리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대학 교수인 강 교수는 흥분했다. 즉시 쌍방 차량의 블랙박스를 확인하자고 했다. 교통사고는 그렇게 해서 간단히 끝을 냈다.
그런데 강 교수가 블랙박스를 가지고 나중에 사건 이전의 내용을 모두 확인해보았더니, 차 안에서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도 들렸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성관계 시간도 꽤 길었고, 대체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적극적이었고, 무척 섹시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남자는 프로같았다. 특별한 감정 표시 없이 무덤덤하게 열심히 육체적인 움직임만 하는 것같았다. 일을 마치자 남자는 곧 바로 다른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정당원 같기도 하고, 정치평론가로서 1인방송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어떻게 관계를 마치자마자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평소 성관계의 중요성과 고귀함, 성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강 교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정치에 빠진 냉혈한같았다.
강 교수는 흥분했다. 집에 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블랙박스를 틀어놓고 난리를 쳤다. 강 교수는 자신의 부인이 그렇게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사 장면을 들어보니 세상에 그렇게 섹시한 여자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때릴 용기는 없었다. 강 교수 자신도 수없이 바람을 피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이런 상황에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고, 오히려 당당했다.
“당신이 만나고 다니는 여자들 모두 증거를 이미 확보해놓았어. 내가 바람 핀 것은 거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어려운 한자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 인생 끝장을 내줄테니까. 나는 바람 필 충분한 자격이 있어. 하지만 당신은 대학교수잖아! 대학교수가 그따위로 위선 떨고 이 여자 저 여자 연애나 하고, 그것도 그 여자들 이용이나 하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고 봐. 나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강 교수는 그 아가씨를 포함해서 미경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당분간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부인과 ‘사랑전쟁’이 시작될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미경을 계속 만났다가는 미경과 함께 심해 속으로 침몰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젊은 아가씨에 대해서도 부인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 아가씨의 구만리같은 앞날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런 재난상황이 오래 계속되자, 미경은 나름대로 강 교수가 부인 핑계대고 자신을 멀리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강 교수로부터 모든 정을 거두어들였다. 가을에 추수를 해서 창고에 쌓아놓듯이, 강 교수와의 사랑의 추억을 보이지 않는 곳에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미경은 놀랐다. 한 때 깊은 정이 들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강 교수의 존재가 전에 사랑을 나누다 감방에 간 건달들과 아주 똑 같은 무게와 질량으로 느껴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남자라는 동물은 성교의 의미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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