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34)

 

하루 아침에 경찰관 신분에서 실업자가 된 박식은 정말 한심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는 경찰관들 중에는 아예 첩을 두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인 이외에 애인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돈이 많은 유부녀를 애인으로 두고 있어 용돈을 받아 쓰는 동료도 있었다. 그런 남자들을 보면, 대체로 박식보다 인물도 덜 했다. 매너도 별로였는데,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여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정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키고, 자녀들 교육도 잘 시키고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평도 좋고, 업무능력도 탁월하고, 상급자 비위도 잘 맞춰서 승진도 빨리 했다. 박식은 나름대로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철저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사건관계인들로부터 부정한 금품인 뇌물을 받지도 않고, 사건과 관계된 사람과는 사무실 밖에서 만나지도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이 경찰에서 수사중인 사건을 알아봐달라고 해도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 친구도 멀어졌다.

 

하지만 박식은 일단 경찰관이 되었으니까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부인도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부인과 사이도 좋았고, 자녀도 사랑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터진 것이었다.

 

자신이 담당한 사건에서 열심히 수사를 해주어서 진실을 밝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임자가 너무 편파적으로 수사를 해서 억울한 여자를 잡아넣으려고 했던 것에 대해 정의감에서 분노를 느끼고 무고죄에 가까운 고소인을 철저히 조사를 하여 피고소인의 무죄를 밝혀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피고소인이 고맙다고 하면서, 특히 박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정의로운 경찰관이라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져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여자가 계속해서 만나달라고 간청하고, 또 그 여자 입장에서는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현직 경찰관과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에서 박식에게 접근하니까 별 뜻 없이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사업을 하면서 돈도 있어 보이고, 차도 외제차며, 옷도 고급 옷을 입고 매너도 좋고 해서 같이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단 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서 여자가 꼬리를 치니 젊은 남자로서 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그 여자가 다 알아서 말썽이 없게 챙길 줄 믿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한번 짧은 시간에 가볍게 한 것을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신이 들린 사람인지, 카섹스를 하고 들어온 여자에게 불륜사실에 대한 의심을 하고, 확신에 찬 나머지 강제수사를 해서 팬티를 압수했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기네스북에 오를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박식은 꽥 소리 못하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집에서 부인에게는 그런 사정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부인에게는 박식이 담당했던 사건에서 무죄가 많이 나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고 했다. 부인은 평소 박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무죄를 많이 받아 사표를 냈다고 하니, 더욱 존경스러웠다.

 

한 동안 박식은 술에 취해 살았다. 평소 출근하던 버릇 때문에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출근 시간이 되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떤 때는 자신이 근무하는 경찰서로 무심코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경찰서 앞에서 정문으로 들어가는 동료직원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도 저 안에 있는 조사실로 가서 악질적인 범죄인을 수사해서 잡아넣어야 할 텐데...’

박식은 경찰서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서 가까운 야산으로 갔다. 슈퍼에서 소주를 두병 샀다. 안주는 새우깡이다.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는 것은 불편했다. 그래도 올라갔다. 힘들게 땀을 흘려야 속이 풀릴 것같았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넘어지기도 했다. 무릎에서 피가 조금 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30분 정도 올라가서 바위에 앉아 시내를 바라보았다. 산 주변에는 아파트가 많았다. 백색 또는 회색의 아파트는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쌓이고 있었다. 늙고 병들고, 실업자가 되고, 이혼하고, 시험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신음소리는 도심의 차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도 TV 소음 때문에 바깥에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두들 폐쇄된 공간에서 극도로 이기적으로, 은폐된 생활을 마지못해 영위하고 있었다.

 

박식은 너무 비참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뜨거웠다. ‘뜨거운 눈물’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 세상에는 거대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했던 것,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찰관이 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를 했고, 어려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비록 십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경찰관으로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근무를 했다.

 

그동안 박식 때문에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운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나지 말아야 할 한 여자를 만나서 한 순간에 이렇게 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박식은 소주를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소주 2병을 마시고 안주는 새우깡으로 했다. 안주는 그냥 씹는 맛이다. 무언가 씹어야했기 때문에 새우깡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도중에 소나기가 내렸다. 옷은 다 젖었지만, 마음은 아주 메마른 상태로 그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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