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서>
포도가 익어가는 시간
밭 모퉁이에서는
사랑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넝쿨에 가려진 그늘을 따라
익숙한 표정들이 이어지고
질긴 가지로 엮인 두 가슴이
몸부림치고 있다
그렇게 뜨거웠던 것이
한때 감동을 주었던 것이
무엇 때문에 식어가고
무엇에 의해 침몰했을까
사라지는 것은
미소와 음성뿐일까
이름까지 가물거리고
추억은 이미 망각의 강을 건넜다
그렇다고 미안한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후회할 것도 아니다
단지 서글픈 것은
네가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가 사랑 앞에서
너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
사랑을 잡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