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철학에서 본 결혼의 의미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 사르트르는 연인 보부아르를 젊은 시절 만나 사랑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식적이며 구속적인 기존의 결혼제도 속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집어넣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은 새로운 시도이었으며, 법과 윤리에 대한 반항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문학활동, 철학 연구, 소설 집필에 매진하면서, 평생 사랑의 밧줄을 끊지 않았다.

 

이들의 독특한 사랑의 방식을 사람들은 계약결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들었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과연 두 사람은 그러한 운명적 사랑(amor fati)으로 인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지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계약결혼, 변형된 사랑의 방식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사르트르는 20세기 실존철학을 대표한다. 보부와르 역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에 입각하여 페미니즘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들의 계약결혼방식 역시 실존주의 시각으로 접근할 때 이해가 쉬어진다.

 

또한 두 사람은 많은 소설을 썼다. 이들의 글쓰는 소질은 남보다 뛰어난 것이어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사랑의 낭만성을 제도로써 경감시키지 않기 위해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결혼의 계약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부르짖었다. 자동차, 의자, 선풍기 등은 모두 목적을 가진다. 특정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존재들의 필요성은 이미 정해져있다. 자동차는 사람들을 태워 이동시키는 것, 의자는 사람들이 앉는 것, 선풍기는 시원한 바람을 송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혀 다르다. 인간은 만들어질 때(태어날 때) 어떠한 목적이나 목표, 용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대 사회나 근세, 현대사회의 초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다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중세나 근대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태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그의 짝인 이브와 함께, 사탄인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악()도 저지르게 되었다.

 

아담과 이브는 결국 지상에서의 천국인 에덴의 동상에서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제2의 인간인 예수를 이땅에 보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불쌍한 인간을 다시 영혼구원하겠다는 언약을 하였다.

 

그러나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는 전제를 부정한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관계를 함으로써 수태되고, 출산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단순한 생리적, 생물학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인간의 출생에 어떠한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정말 우연히 태어나고, 생명을 얻었으며, 스스로 내재된 삶의 의지와 의식적 무의식적 신체 활동의 지속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혼자 태어나는 것이지, 다른 동물들처럼 동시에 수십명이 무리를 지어 태어나지도 않는다.

 

실존철학의 이전에는 인간의 본질을 꾸준히 탐구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론(essentialism)에 대비되는 것이 이른바 실존론(existentialism)이다.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은 그의 본질에 앞서는 실재하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단정했다. 자동차나 의자와 달리 인간은 특정한 목적이나 용도가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절대적인 완전한 자유 상태에 놓인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완전한 개별적인, 개인적인 자유를 가지고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심지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죽음은 선택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부여받았지만, 그 대가로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무척 좋은 것만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선택은 매우 피곤한 일이며, 때로는 고통이다.

 

특히 선과 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 악과 악 가운데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은 망가진다. 한 사람을 잘못 선택해서 결혼하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사기꾼 한 사람을 잘못 만나 사기를 당하면 순식간에 거지 신세가 된다. 묻지마 살인범을 선택하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다.

 

이와 같이 개인의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와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포기하거나 상실하면 타인의 노예로 전락한다.

 

인간의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은 언제나 인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 사회의 공통선이나 오래 된 습속, 또는 윤리의식의 범주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옛날 적은 규모의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에서의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간다. 몇십명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각 개인들의 생각과 행동은 대체로 집단의 공통의식과 생각, 도덕 규범에 따라 행해지도록 유전적 기질을 타고 나고, 여기에 학습과 경험이 덧붙여져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후 집단이나 사회의 규모가 커졌을 뿐, 기본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은 그 본질이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이와 같이 끊임 없이 올바른 선택을 하며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가치중립적인 실존은 서서히 의미 있는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존은 대자존재(對自存在)로서 객관적인 상태의 자기 자신과 직면하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이러한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나와 너를 분석하고, 결혼의 의미와 결혼생활이 두 실존에게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며, 두 사람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억압하고, 결혼으로부터 얻는 실존적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랑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거짓말, 결혼동업의 청산  (0) 2022.07.05
배우자의 부정행위  (0) 2022.07.04
이혼하면 부부는 100% 남이 된다  (0) 2022.07.03
이혼의 위기에 서서  (0) 2022.07.03
<이혼학 세미나>  (0) 2022.07.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