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간의 모텔에서의 성관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들은 머물 둥지를 상실한 채, 삭막한 초원에서 순간적으로 도피하고, 커튼을 내려 어두운 공간을 만든 다음, 그곳에서 실존의 고독함을 진한 몸짓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내는 신음소리는 환희라기 보다는 힘든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말초적인 쾌락을 얻는 것 같지만, 떠날 때 그들은 허무와 절망을 또 다시 가슴에 품고 나선다.

 

영식과 경희는 사랑을 나눌 때 주로 모텔을 이용했다. 우리나라 모텔은 미국의 모텔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의 경우 모텔은 주로 도심지에서 벗어난 교외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자동차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다. 가족 단위나 연인끼리 여행하는 사람,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우리나라 모텔은 정 반대다. 주로 도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는 교통이 편리한 지하철역 부근에 밀집되어 있다. 아니면 드라이브 코스 지점에 위치한다. 이용하는 사람들 중 여행자는 별로 없고, 주로 섹스를 하기 위해 남녀가 들어가는 곳이다. 들어갈 때부터 두 사람은 섹스를 할 의사의 합치가 되어 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모텔에 들어가면 일단 두 사람은 샤워를 하고 곧 바로 섹스에 들어간다. 섹스가 끝나면 다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나온다. 그 다음 곧 바로 헤어지거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텔 이용 현황이다. 이곳에는 낭만도 없고 진정한 사랑도 부재한다. 오직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섹스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 사이면 괜찮은 편이다. 처음 만나 곧 바로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성매매의 관계다. 성매매(性賣買)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매우 어색한 용어다.

 

(, sex)을 매매한다는 뜻이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매매라는 신조어가 출현하기 전에는 매음(賣淫)’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음란을 판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 자체로 매우 지저분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청량리 588>을 연상케했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닭장 같은 형태의 작고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방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기 위해 야한 옷차림을 하고 밖에 나와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돈을 받고 관계를 해주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창녀(娼女)라고 불렀다. 창녀는 인격이 전혀 없는 성노예신분이었다. 강제로 끌어다가 폭행 감금하는 형태로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을 상대로 섹스를 하도록 강요하는 악질적인 포주(抱主) 밑에서 신음하다가 병이 들고 죽어간 불쌍한 인생들이 그동안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존재했던가!

 

지금은 이러한 사악한 인간시장인 공창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대안으로 인터넷을 통한 성매매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공창, 매음이라는 저속한 용어 대신에 약간 고상한 성매매, 조건 없는 만남, 애인대행이라는 낯선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들의 매음 장소는 주로 싸구려모텔이나 오피스텔이다. 현대판 매음의 주된 수단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텔방은 평온했다. 영식과 경희 두 사람만의 은밀하고 폐쇄된 공간이었다. 알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속정도 들었고, 서로에게서 따뜻한 배려도 받았고, 마음의 위안도 받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이상하다. 혼자 있으면, 몸과 마음은 고독을 느끼고 깊은 심연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그래서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투영시키고, 몸과 몸을 마찰시킴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마치 발전기가 양과 음의 극을 연결시켜 에너지를 창출하듯이, 인간도 똑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마음은 죽음을 향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마음과 연결되면 삶을 향한다. 그래서 죽음을 망각한다.

 

영식과 경희는 비록 허용되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사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생활과도 연결되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섹스를 하면서, 살아가면서 받는 많은 스트레스도 잊을 수 있었다.

 

성적 결합을 통해 서로가 상대를 자신의 것이라고 의식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완전한 소유는 아니어도, 관계한다는 것은 그 순간 일시적인 소유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정은 바로 이런 작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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