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핀 유부녀도 불륜의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겨울 바다는 추워서 물속에 들어가면 그냥 익사하는 것처럼 현실에는 언제나 냉냉한 기운이 상존한다. 그런 차가움 속에서 사랑의 온기를 느끼려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사랑은 현실이라는 냉탕 속으로 던져지는 순간 질식한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모든 사랑의 요소는 형해화되며 분해되어 흩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매케한 악취만 남는다.

 

경희는 사랑 때문에 추락했다. 무서운 늪에 빠졌다. 이런 극한상황에 처한 연약한 실존에 다가가 손을 잡아줄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친척도, 가족도 없다. 오직 혼자다. 경희만이 겪어야 하고 넘어야 할 벽이었다. 벽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흰색이었다. 중범죄인을 고문하는 하얀 페인트만을 칠한 조사실처럼 눈이 부셨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 아니었다. 가능성의 색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파멸이고, 죽음이며, 불가능의 상징이었다.

 

이 외로움, 불안감, 어두움을 누구에게 의지해 풀어나갈 지 앞이 캄캄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희가 만나서 상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희는 밤거리에서 혼자 절규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은 환경 탓이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것은 남편 탓이었다.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고 삭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탈출했던 죄밖에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일이 잘못되면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에서 찾는다. 바람을 핀 남자와 여자는 바람 핀 원인과 이유를 배우자에게서 찾는다. ‘너 때문에나는 완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탈했다’. 그러니까 나도 잘못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너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항변한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착각하고 억울해 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배우자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남편도 바람을 핀 적이 있다. 그때 경희는 눈감아 주었다.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려고 했다. 생충도 평소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밖에 나가면 외간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노래방에도 많이 다녔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도우미 언니들과 여러 차례 연애를 했다. 생충은 그때마다 도우미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경희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경희는 그런 문제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따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희 아버지도 바람을 피면서 살았다. 그런 문제 때문에 싸웠지만, 어머니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지만, 밖에서 아이는 낳지 않았고, 내놓고 두집 살림도 하지 않았다.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경희 역시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도 큰 피해는 없다고 여겼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경희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는지, 남편이 외도를 해도 치명적인 상황만 안 만들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경희는 남편도 혼외정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경희에 대해서만 아주 엄격하게 따지고 문도 열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솟구쳤다. 경희는 남편이 너무 무서워졌고,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비참해졌다. 남편에 대한 만정이 떨어져 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상대의 태도, 특히 남편의 태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비판하고 불만을 가진다. 부부는 남남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관계다. 피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을 때 좋은 것이지, 관계가 나빠지고 악화되면 남보다 더 무섭고, 더 냉정해지고, 더 가혹하게 공격을 할 소지가 있다.

 

치정범죄의 경우에는 일반 폭력범죄보다 더 가혹하게 아내를 살해하거나 폭행을 가한다. 일반 강도살인범죄는 한 두 번 칼로 찔러서 죽으면 끝을 낸다. 그런 다음 물건을 가지고 도망간다.

 

그러나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은 아예 사체를 난도질한다. 그것이 치정범죄의 잔혹성이다. 특히 변심한 애인을 상대로 하는 폭력은 잔인하다. 얼굴에 염산을 뿌리거나, 코를 면도칼로 베어버리거나 성기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범죄는 바로 남녀 사이의 원한과 증오심에서 유래하는 잔혹함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일이 잘못되면 그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이며, 자신에게 그 원인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그게 인간의 한계다.>

<바람 피다 걸린 여자가 남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

 

경희는 현재 상황이 그래서 연락하지 말자는 말을 이해는 했지만, 막상 영식이 그런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울컥했다. ‘이런 사람을 믿고, 몸과 마음을 주었다니, 정말 실망이다. 저렇게 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일까?’

 

만일 경희가 남자 입장이었다면,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기다려요.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장난한 것이 아니니까. 서로 변하지 말고 기다려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게 남자로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영식은 남자답지도 않고, 정말 경희를 사랑했던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경희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경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식의 휴대전화에는 부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다. 심지어 음성메시지까지 남겨져 있었다. 영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부인은 몹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영식의 부인은 얼마나 딱한 처지인가? 남편을 가장이라고 믿고 자식들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였다.

 

남편이 자주 늦게 들어오고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설마 다른 여자와 모텔까지 들락거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아무리 늦어도 전화는 꼭 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까지 전화 연락도 없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소식이 없으니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부부란 일심동체이며, 평생 동고동락을 하는 공동생활체다. 내것 네것 없이 뒤섞여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생활하는 무촌(無寸) 관계다. 그래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항상 부부 사이에서 먼저 말하고 함께 좋아하고, 함께 걱정하게 된다.

 

영식의 일은 전혀 달랐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정작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성질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완전히 하얗게 비어있는 것 같았고, 세상은 온통 까맣게 먹구름이 끼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왔다. 슬픔의 강물에 영식은 파묻혀 멀리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외로운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영식은 일단 집에 들어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경희는 남편을 볼 면목도 없고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외박을 했다가는 일이 더 커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경희는 집 앞에 이르러 전화를 했다. 남편은 받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눌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집에 알릴 수도 없었다. 영식은 이미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경희는 혼자서 어디 갈 곳을 잃은 철새가 되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처지였다.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안에서 빗장을 걸어놓으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 있으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정상적이면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어야 할 부부 사이에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떤 심정일까?

 

남의 집을 방문했다가 주인이 없어 못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집이고 둥지를 틀고 사는 보금자리다. 그곳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을 느껴 보라. 얼마나 외롭고 세상이 황량하게 느껴질까?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반대 당사자의 마음도 똑 같다. 아니 더할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 부부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싸우더라도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몰고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가 받는 상처가 너무 깊고 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경희는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랑보다는 삶이 중요하다. 생존이 우선이다. 사랑은 사치고 부수물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소중한 가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낯선 사랑에 빠졌다. 그 허망한 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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