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권태(1) 


                                                                       가을사랑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고독이다. 혼자라는 생각에 느껴지는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혼자서 살 수 없다는 뜻은 혼자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이 있어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행동해서는 견디기 어렵다는 의미다.


고독이 계속되면 죽음에 이른다. 겨울의 깊은 밤, 긴 시간에 혼자서 고독을 느껴보라. 그 고통은 지옥이다. 그 고독이 오래 계속되면, 그리고 언제 끝날 지 아무런 기약이 없으면 사람은 병들고 죽음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이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고독을 버틸 수 있는 능력은 실존적 한계가 있다.


고독은 왜 오는 것일까? 고독은 마음에서 온다. 스스로 고독에 빠져드는 것이다.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혼자만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우물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우물 속에서 밖을 보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우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다. 우물이라는 외부와 차단된, 햋볕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존재 때문에 시야가 가리게 되고, 대화가 끊어지게 된다. 스스로 고독이라는 우물을 만들고, 더 깊이 파들어 가면서 그 안에 숨은 채 외부와 차단되는 과정이 바로 고독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고독이라는 우물은 왜 파는 것일까? 실존의 본질과 개체의 특수성 때문이다. 원래 실존이란 외롭다. 그래서 다른 실존들과 어울려 있으면서도 혼자만의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도시에서의 고독을 생각해 보라. 그 수 많은 사람들이 끊임 없이 오고 가는데,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데, 개인의 발걸음은 웬지 힘이 없고, 무겁기만 하다. 들려오는 캐롤송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다.


때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 좋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혼자 있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실존은 고독의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이때도 고독해지기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니다. 고독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고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들의 허상이 싫어서인 것이다. 군중들이 만들어내는 공허한 허상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이 싫어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뿐이다.


군중으로부터 일시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시 군중 속으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의 실존은 군종 속에서 함께 어울리다가, 일정한 시간 혼자 있기를 원하고, 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군중 속에 들어가 어울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지면 함께 지내는 시간이 권태롭고 짜증나고,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자아가 강하게 발현되며, 그 자아의 특성 때문에 군중 속에서 더 이상 어울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된다.

 

군중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개체만 내적으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군중은 그 개체의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개체의 일부 변화는 거대한 군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한 사람이 빠졌다고 해도, 교회에서 한 사람이 예배에 빠졌다고 해서 무슨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사람이 자살을 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 사회는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고 잘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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