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초등학교


가을사랑

 

 


인간에게는 분명 운명이 존재한다. 거역할 수 있는 커다란 흐름의 운명이 있다. 운명에 순종하든지, 운명을 거역하면서 물결을 반대로 타고 올라가든지, 그건 선택의 문제다. 다만,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인간이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대신초등학교가 떠올랐다. 내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대사동과 대흥동이 보이는 학교 운동장, 소나무가 많았던 뒷산, 가파른 비탈길 그곳에서 내 어린 시절은 잔뼈가 굵어졌다.


조용히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이었다. 꿈을 꾸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하루 하루 시계추 같은 일상의 생활을 되풀이해야 했던 공간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순수했다.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도 없었다. 그냥 하루를 열심히 살고, 운명에 순종하면서, 세상을 밝게 바라보면서 살았다. 


추운 겨울날에도 나는 혼자서 가끔 뒷산에 올라갔다. 눈이 많이 쌓인 날 애써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없어 애를 먹던 때도 있었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는 그렇게 달랐다. 뒤를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무작정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때 깨달았다.

 

삶도 그럴 것 같다. 내려올 일을 생각하지 않고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는 사람은 언젠가 다시 내려올 일이 아득하다. 자칫 추락할 위험이 있다. 적당히 올라가야 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는 만큼만 올라가야 하는데, 혼자 무작정 올라가다 보면 어느 날 천길 낭떠러지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려올 길이 없어 안절부절하다가 그냥 내려왔는데, 그러다가 나무에 무릎 아래를 심하게 부딛혀 고생을 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퉁퉁 부어 안티프라민을 많이 발랐다. 등산화도 없었던 시절에 많이 달았던 운동화를 신고 올라갔으니 미끄러지지 않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름방학에는 형과 함께 거의 매일 저녁 대신초등학교에 올라가 돗자리를 펴고 누워 음악을 들었다. 형은 나와 두 살 차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던 형이 들고 다니던 핑크빛의 작은 전축, 그 전축에서는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밧데리로 작동을 시키면 노래가 나왔다. 패티킴, 나훈아, 남진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판이 비싸 몇 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판을 수 없이 되풀이해서 들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듣던 그 시절, 그 가수들의 특이한 목소리는 왜 나를 그토록 빨아들였는지 모른다.

 

학교 운동장에서 가장자리, 교문 입구 쪽이 우리가 단골로 자리를 잡았던 곳이었다. 그 전축은 형이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온 유일한 재산목록 1호였다. 판을 틀을 때도 형이 혼자 만졌고, 나는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나 역시 기계를 만지는 것을 겁을 냈기 때문에 어떻게 트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돗자리에 누워 가요를 들으면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들이 반짝반짝 머리위를 비춰주고 있었다. 별들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왔다. 별이 흐르고 있었다. 운동장은 커다란 강이 되고,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강물 속에 별들이 쏟아져 내려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흐르고, 별이 흐르고,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 은은한 노래를 들으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면 별은 다시 꿈속에서 또 나타났다. 별은 꿈이 되고, 꿈은 별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방학이라 학교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는 풀벌레들과 친구가 되어 운동장에서 뒹굴고 있었다. 풀향기가 우리를 감싸주었다. 비탈길 입구에 있던 낡은 집에서 우리는 3층 건물을 지었다. 아버님이 다 설계하고 감독을 하신 집이다. 일하는 사람들만 개별적으로 구해 지었다. 말이 3층이지 3층에는 그냥 방 두개만 만들어놓았다.


나는 보조역할을 했다. 건축재료를 주문하고 사오고, 함께 나르는 일이었다. 잔심부름거리가 많았다. 새참거리도 사오고, 벽돌, 세멘트, 못, 나무 등등 모두 그때 그때 필요하면 가서 사와야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걸어 가서 마차에 짐을 싣고 뒤에 타고 오던가 아니면 걸어서 뒤따라 와서 마지막 비탈길에서는 마부가 앞에서 끌고 나는 뒤에서 힘껏 밀어야 했다. 집까지 올라오는 비탈길은 꽤 길었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에 늘상 마차를 끌고 오던 마부들이 그곳에 와서는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말도 힘이 들고 지쳐서 그런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뒤에서 죽을 힘을 다해 밀어야 하는 나는 마차가 뒤로 밀릴까 위험을 느껴야 했다.

 

나는 아버님 대신 그 불평을 들어야 했다. 여름에는 땀이 무척 많이 났다. 시원한 음료수 대신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다 주면 인부들은 참 고마워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짐을 함께 내려야 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런지 공사는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나중에 빚을 지고 무리하게 집을 지어서 아버님은  빚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퇴미고개를 넘어서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아주 강하게 떠오른다. 약국은 큰 길까지 내려가야 겨우 하나가 있었다. 약을 사러갈 때가 제일 귀찮았던 것 같다. 몇장의 사진을 보면서 웬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영혼을 맑게 해놓고 하늘을 보고, 별을 보던 그 공간,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시절, 나를 둘러싸고 함께 공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들의 훈훈함 때문이다. 

 

 

                                        

                    [대신초등학교 정문이다. 이곳까지 올라가려고 해도 한참 힘이 들었다.]

 

 

 

 

 

 이 언덕길은 내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 많이 오르락 내리락 했던 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때 지은 3층집이다. 1층은 가게 2칸, 2층은 2가구 주택, 3층은 1가구 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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